소설 '요노스케 이야기' 좀 더 읽기
요노스케 이야기 よこみち よのすけ (2009, 은행나무) 저자/요시다 슈이치, 역자/이영미
어리바리 요노스케 상경기(上京記)
신주쿠 역 동쪽 출구. 촌에서 갓 상경한 청년의 모습이 보인다. 이 어리바리한 친구의 이름은 요코미치 요노스케(주1). 도쿄의 대학을 다니기 위해 홀로 올라왔다. 무거워 보이는 가방 안에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과 낡은 학교 체육복, 늘 사용하던 - 받침대가 대리석이라 무척 무거운 - 탁상시계까지 들어 있다.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지나가는 행인들. 화려한 번화가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사방에 구경거리가 넘쳐 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옮긴다. 앞으로 이 고장에서 살게 됐으니깐 첫날부터 너무 욕심낼 필요 없어. '고장'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부터가 범상치 않다.
주1) 요코미치 요노스케 : 일본 성문학(性文學)의 아버지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에도시대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소설 [호색일대남]의 주인공 이름이다. '변강쇠'라고 하면 대충 비슷한 느낌일까.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요노스케 이야기]는 이 촌스럽고 어리바리한 열여덟 살의 청년, 요노스케가 도쿄에서 보낸 1년을 담아낸다. 말 그대로 평범/무난/태평한 대학 신입생의 생활이다. 솔직히 처음엔 걱정이 앞섰다. 요노스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런 주인공으로 무슨 소설이 되겠나 싶었다. 어지간히 타이밍 못 맞추는 요노스케를 보며 키득거리다가도, 결국 아무 생각 없는 청춘들이 웃고 떠들고 소리치고 울고 결국은 조금은 성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그저 그런 성장 소설 중 하나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내가 이 작가를 처음 접한 게 [악인 惡人] (2008)이라는 작품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해두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농밀한 영역을 세심하게 그려낸 [악인]을 읽으며 느꼈던 긴장감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 라고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누구에게라도 일독(一讀)을 권해주고 싶어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평범하면서도 엉뚱한 요노스케의 상경기(上京記)다. 그와 동시에 그 시절의 요노스케를 알고 지내던 이들의 후일담/회고담이기도 하다. 요노스케의 자취 생활이 한창 묘사되다가도, 어느 순간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의 미래로 점프(주2)한다. 처음 읽을 때에는 이런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구성이 영 생경하다. 옛날 TV 프로그램이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고 있는데 띄엄띄엄 새로 녹화된 영상을 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어색함은 곧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읽는 즐거움이 채워진다. 요노스케와 (얕던 깊던) 연결됐던 이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지켜보며 책 속에서 그려진 1년 이후의 일들을 짜맞춰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주2) 과거회상(flash-back)과 반대되는 flash-foward 라는 용어도 있지만, 적절한 단어일지는 모르겠다.
요노스케는 시골에서 갓 올라온 대학 신입생일 뿐이다. 대학 친구,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 자취방 이웃, 그리고 가족들... 빈말로도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인간관계에 대단할 것 없는 일상이 전부다. 누군가에게 요노스케는, 어제도 오늘도 수없이 스쳐 지나간 작은 인연 중 하나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요노스케와의 인연은 누군가의 삶에(요노스케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다. '나비효과'처럼 작은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으로 확대된다는 의미도 아니다. 작은 인연이 쌓여 우리의 삶은 완성되어 간다. 이것이 [요노스케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다.
사소한 인연이 쌓여 삶이 된다
일상(日常)이 쌓여 일생(一生)이 된다 - 라는 메시지는 독특한 구성의 덕을 톡톡히 본다. 1년간의 상경기에서 묘사되는 소소한 일상들이 후일담에서는 인생의 중요한 굴곡이 되어 등장한다. 추리 소설에서처럼 분명한 인과 관계는 없다. 하지만 요노스케와의 접점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 라고 여기게 만드는 은근함이 [요노스케 이야기]의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누군들 이런 친구 하나쯤 없었을까. "그 애 이름이 뭐더라"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어린 시절의 단짝. "아 맞다, 그런 이름이었지" 결국 이름을 기억해내지만 성씨는 틀리고 마는 중학교 시절 반 친구. 졸업 앨범을 들춰 보고 나서야 생각나는, 약간은 어색한 정장 차림으로 웃고 있는 사진 속 동문.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사소한 이유로 다투고 헤어진 첫 여자/남자 친구.
얼굴도 이름도 흐릿해진, 그래서 어디에나 있을 법한 그런 친구 말이다. 그래, 누구나 그런 친구가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노스케가 그렇다. 얼렁뚱땅 대학교 삼바댄스 동아리에 가입한, 웃음이 나올 정도로 '멋진 남자'와는 거리가 먼, 화가 나면 본의 아니게 존댓말이 튀어 나오는 엉뚱한, 에어컨이 있는 친구 방에서 몇 주고 죽칠 수 있을 만큼 뻔뻔한, 채찍으로 때리고 맞는 하드한 것보다는 해변에서 하롱하롱 뛰어다니는 야동이 좋다는 녀석이다.
이 정도면 꽤나 기억에 남을 캐릭터 같지만, 애석하게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의 이름을, 얼굴을, 추억을 곧잘 잊어버린다. 아니, 잃어버린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추억은 생활에 무뎌져 과거가 되고, 과거는 세월에 깎여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떠오르는 그리움과 아련함에 그런 녀석이 있었지 - 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이유는 생활의 고단함에도 세월의 무정함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평범과 엉뚱함, 낙천과 어리바리의 사이에서 느긋하게 완보(緩步)하는 - 절대 '질주'가 아니다 - 요노스케를 만났다. 비록 작품 속 인물과 독자의 관계라지만 나의 삶도 요노스케와의 만남에 조금은 바뀌게 될 것 같다.
누군가 내 삶의 한 조각이 된다. 나 역시 당신의 삶에서 한 조각이 되어 살아간다. 평범한 인생은, 이 얼마나 대단한가.
수년 전에 읽은 소설 이야기를 이제야 다시 꺼낸 것은 동명의 영화(연출 오키다 슈이치) 가 지난달 개봉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덕분이다. 친하게 지내던 동창의 결혼 소식을 뒤늦게 접한 기분이다. 미안하고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