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코믹스 그래픽노블 '킹덤 컴' 좀 더 읽기
슈퍼맨은 지쳤다. 배트맨은 늙었다.
몰락한 왕국.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킹덤 컴]은 위대한 작품이다. 알렉스 로스의 사실적인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마크 웨이드의 진중하고 장엄한 스토리는 이 작품을 슈퍼히어로에 대한 인식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슈퍼히어로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뜯어 말려도 살 책인지라 이 자리에서 구구절절 찬사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사서, 읽으시라. 후회할 일은 없다. 할말 끝. 하지만 이렇게 끝내기엔 아쉬우니 몇 마디만 더 써 볼까 한다.
나에게 슈퍼맨은 애당초 매력적인 히어로가 아니었다. 바지 위에 팬티를 입은 패션 센스에 질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완벽함'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리라. 아이로니컬하게도 슈퍼맨은 인간(man)이란 단어로 부르기엔 부적절한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의 육체적 능력과 정신적 순수함은 인간의 범주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초인(超人, superhuman)이라는 어휘는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열광하는 수많은 (슈퍼)히어로들 중에서 슈퍼맨의 존재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밀린 집세에 괴로워하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브루스 웨인(배트맨)은 둘 모두 '인간적인 결점과 약점에 고통 받고 또 고민하는 존재, 즉 인간'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동등하다(주1). 그러나 슈퍼맨은 말 그대로 신(神)적인 존재이다. 문제는 신이 현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빨갛고 파란 타이즈를 입은 채로 말이다.
이런 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신이 있다. 그런데 미국인이다. 그것도 완벽한 앵글로-색슨족이다. 그는 잠들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듣는다. 그는 모든 시간에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주2). 그의 고결한 도덕적 잣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죽지도, 다치지도, 심지어 지치지도 않는다. 영원불멸의 존재는 그렇게 높은 곳에 우뚝 서서 우리를 향해 두 눈을 번뜩이며 서 있다. 영원히.
주1) 물론 찌질이(...) 클라크의 모습으로 있을 때에는 약점이 넘쳐난다. 하지만 나는 인간 클라크가 슈퍼맨의 페르소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실체가 아닌, 일종의 가면 같은 존재처럼 느껴질 뿐이다. 물론 TV시리즈 [스몰빌]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확장시켜 '인간' 슈퍼맨을 부각시키지만 이건 논외로 치자.
주2)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슈퍼맨의 능력과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고려했을 때, 그는 언제라도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잠깐 묻고 싶다. 우리는 신(神)을 왜 믿을까. 영원의 존재에 기댐으로서 필멸자인 인간이 사후에도 영혼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믿고 싶어서일까. 혹은 보다 높은 차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조금의 위안'을 위해서일까. 어떤 이유가 됐든 간에 신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신의 부재(不在)에 기인한다. 어떤 교인들은 현실에 현현한 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한다. 감자칩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찾고, 간증 속에서 신의 말씀을 듣는다. 하지만 이 역시 신이 '지금 이곳에(right here right now - Van Halen)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없기에 찾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슈퍼맨의 존재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까놓고 말해서 엄청나게 귀찮다. 종교의 신이 신용카드라면, 슈퍼맨은 체크카드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전자가 "음...네 놈이 죽기 전에 나쁜 짓 좀 했구나.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며 사후판결을 내린다면, 후자는 즉결 심판이다(물론 슈퍼맨은 '처벌'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슈퍼맨의 세계에서 모든 범죄자는 법원으로 보내진다). 공포와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창백하게 '평화로운' 사회는, 과연 완벽한 세상일까. 그곳은 비록 범죄 없는 세상일지는 몰라도,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잘못될/엇나갈 가능성 자체가 배제된 사회, 그것도 초월적인 존재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회는 타락할 가능성과 함께 성장하고 진화할 기회마저도 박탈된 사회가 아닐까.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사고를 친다. 범죄를 저지른다. 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그 와중에 개인과 집단과 사회는 잘잘못을 깨치고, 반성하고, 배운다. 슈퍼맨의 존재는, 걷기 위해 넘어지고 뛰기 위해 무릎이 깨지는 '성장'을 방해한다. 어른이 되지 못하고 아이인 채로 영원히 슈퍼맨의 보호 아래 살아간다... 글쎄, 나는 사양하고 싶다.
그럼 이번엔 슈퍼맨의 매력적인 제안을 사양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현실 속의 슈퍼맨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얘기는 '그 순간에 누군가는 슈퍼맨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슈퍼맨은 혼자다.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한들 혼자 몸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초에 1.78명이 죽는다. 1분에 107명, 하루에 153,000명이 유명을 달리한다. 이건 자연사까지 포함한 수치이니 논외로 해놓고, 그럼 다른 자료를 찾아보자. 2007년 UN보고서에 따르면 매일 18,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기아로 사망한다고 한다. 슈퍼맨, 도와주세요. 저도요! 저도요! 미안, 몸이 하나라서. 알고 있다. 혼자서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것 쯤은. 모두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은 억지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신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해오지 않았던가. 로또 번호 좀 알려주세요, 아멘/알라/나무관세음보살.
"제가 고통 받을 때 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현실에서라면 이 외침은 하늘을 향한 공연한 화풀이에 불과했겠지만, DC의 세계(DC 유니버스)에서는 다르다. 신에 대한 야속함은 슈퍼맨에 대한 배신감이, 지탄이 된다. 1명의 목숨을 구하느라 99명의 목숨을 놓친 빨간 망토의 신은 그렇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지만, 슈퍼맨이란 이름의 신은 주사위를 던져 구원할 대상을 정하는 것일까. (사실 슈퍼맨이 지키는 '세계'는 메트로폴리스 시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닐까 - 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그 판단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도덕적 판단이 필요 없는 재난과는 달리 전쟁과 테러 같은 국제 분쟁은 단순하지가 않다. 전쟁이 터졌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마을이 미군의 폭격을 당했다. 마침 결혼식을 치르고 있던 민가도 공격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어린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 3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주3). 오열하는 그들 앞에서 '미국의 정의'는 합당한가. 슈퍼맨이 지키는 정의는 누구의 정의인가, 누구의 자유인가, 누구의 잣대인가. 아니, 애초에- 슈퍼맨은 '누구의' 신인가?
주3) 실제로, 미국 대선 결과가 발표되던 날에 벌어진 일이다. Air strike kills Afghan women, children attending wedding, villagers say (11월 5일자 CBC 기사)
슈퍼맨의 '슈'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떠들고 있는데, 작가들은 오죽했을까. 그래서 지나치게 완벽하고, 그래서 지나치게 고루한 자신들의 히어로에게 시련을 던져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련은 크립토나이트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슈퍼맨을 괴롭힌다. 인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의 고뇌, 번민 그리고 고통. [킹덤 컴]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난 슈퍼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딘가 허점이 있는, 사람 냄새가 나는 히어로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킹덤 컴]에 등장하는 늙고 지친, 하지만 여전히 고지식한 슈퍼맨은 좋아한다. 끊임없이 번뇌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연민을 느낀다. 고독한 이방인을 바라볼 때 솟아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가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하늘을 날 수 없었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면, 루이스 레인에게 번번이 퇴짜 맞는 클라크 켄트의 삶을 살았더라면, 그는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킹덤 컴]은, 적어도 내 안에서는, 슈퍼맨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었다. 추천의 말은 이것으로 충분하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왕국이 도래했다. 지친 평화와 비참한 승리만을 남기고. 이 위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