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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디지털 리터러시, 그 가벼움에 대하여 #2

학생들의 디지털 문화를 이해해보고 싶어 나를 돌아보다.

by 김의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디지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요즘 학생들의 삶과 문화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디지털 문화 속에서 기기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아이들의 모습. 하지만, 막상 학교 현장에서 디지털 리터러시를 활용한 교육을 하려고 보면 아이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아 놀라는 교사들이 많다. 특히, 코로나19 국면에서 원격수업이 시작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컴맹 출신의 교사보다도 낮은 수준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과연 요즘 학생들은 어느 정도의 폭과 깊이를 디지털 리터러시를 쌓아가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연구를 할 것은 아니기 때문에, 먼저 나라는 사람 한 명의 사례를 통하여 학생들의 입장을 추측해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 글은 나라는 사람의 별 볼일 없는 일기, 또는 한 없이 주관적인 견해가 가득한 내용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디지털 리터러시를 쌓고 활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해보시기를 권한다.




마이컴, 컴퓨터 잡지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정보를 원했고,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매체는 있었다. 그 중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이 월간 잡지였고, 컴퓨터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매월 살 수는 없었지만, 형과 나는 가끔씩이라도 컴퓨터 잡지를 사서 읽었다. 큰 서점에 가면 스포츠 잡지와 함께 컴퓨터 잡지를 훑어보는 것도 재미였던 기억이 난다. ‘마이컴’이라는 잡지는 우리에게 신세계의 냄새라도 맡을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이컴을 사면 별책부록으로 주었던 ‘게임컴’의 차트를 보며 새롭고 재미있는 게임에 대한 정보를 접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월간 컴퓨터 잡지 ‘마이컴’ 그리고 별책부록 ‘게임컴’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PC통신, 하이텔과 나우누리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마이컴 등의 컴퓨터 잡지에서 해 주는 이야기는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그 외에는 관련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컴퓨터 잡지에서는 PC통신, 비디오텍스, 케텔 등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뭐, 잘 모르는 이야기이기도 했고 대부분의 관심이 게임 쪽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모뎀’이 들어왔고, ‘PC통신’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국민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시기였다.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ATDT 01410’을 입력하면, ‘지~지익~칙’하는 소리와 함께 ‘하이텔’에 접속할 수 있었다. PC통신에 접속한다는 것은 모뎀을 사용한다는 것이고, 모뎀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 집 전화선이 통화중이 된다는 것이며, 통화중이 된다는 것은 전화요금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한 마디로, 있기는 하지만 쉽게 사용하기는 어려웠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나름대로 공대 출신의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 덕에, 우리 형제는 신문물을 비교적 빠르게 접하기는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 껏 활용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C통신은 우리 형제의 삶에 정말 큰 영향을 주었다.


PC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하이텔의 자료실은 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저작권의 개념은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던 당시만 해도 국내에 정식 발매되지 않은 해외 프로그램들이 공유되는 곳이 자료실이었다. 용량이 큰 프로그램은 다운받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데이터 파일은 활발하게 공유되었다. 특히, 고용량의 그래픽과 동영상보다는 음악 파일을 많이 내려받았던 기억이 난다. 1990년대 초반의 중학생도 이렇게 컴퓨터를 통해 소통을 했었다.


atdt 01410 ‘하이텔‘ 최초 접속화면과 ‘자료실’ 접속 화면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PC통신의 최대 매력은 ‘동호회’에 있었다. 게임 동호회에선 최신의 게임 정보가 빛의 속도로 공유되었다. 1994미국 월드컵 이후로 해외 축구에 관심이 많아졌던 형과 나는 ‘축구 동호회’에 자주 접속했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설픈 축구지식으로 토론에 참여하며 글을 남기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열심히 축구동호회 활동을 하던 형은 1997년 월드컵 최종예선 당시에 적극적으로 오프라인 모임에도 참여하고 유니폼을 입고 잠실주경기장에 직접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PC통신 동호회 활동이 붉은악마 초기시절의 직접참여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아이디로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형이나 나나 너무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만의 아이디를 가지고 싶다는 꿈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우누리 아이디를 만들면서 이룰 수 있었다. 나우누리에서 월4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대학생에게 계정을 만들 수 있게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었다. 이 때문일까 90년대 후반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나우누리를 사용했다. 술을 먹지 않던 나로서는 매주 한 번 씩 우리과 선배들과 ‘정모 대화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수 있었던 기억도 난다. 공강시간에 학교 중앙전산원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대학생들의 대화방 여기저기에 들어가 열심히 ‘채팅’을 하던 추억도 있다.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대화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빠른 타이핑이 필요했고, 타자수가 삽시간에 엄청나게 늘기도 했었다.


나우누리 접속 화면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컴퓨터와 소리, 음악


초등학교 때만 해도 컴퓨터의 소리라는 것은 삐빅거리는 소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락실에서 돈을 넣으면 할 수 있던 게임의 음악과 우리집 컴퓨터의 음악소리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 잡지에서 ‘애드립 카드’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얼마 후 어떤 경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집 컴퓨터에 애드립카드가 설치되었다. 여러 개의 악기 소리가 동시에 나오는, 이른바 7~8중 화음은 소리의 신세계였다. 신세계를 더 넓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음악(사운드) 파일이 필요했다. PC통신 자료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다중 화음의 신세계 ‘애드립 카드’ - Ad Lib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이 때가 특히 기억나는 것이 PC가 노래방 역할을 했던 일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고유의 파일형식아라고 들었던 [*.IMS] 파일이 있었다. 임플레이(IMPLAY) 또는 옥플레이(OCPLAY)라는 프로그램으로 재생하여 노래방처럼 사용하는 방식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최신곡이 나오면 PC통신 자료실에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버전의 IMS 파일이 업로드 되었기에 ‘집안의 노래방’은 빠르게 업데이트 될 수 있었다.


노래방 프로그램의 양대 산맥 IMPLAY 와 OCPLAY (출처: 옛날게임 - HLBOYS의 고전게임 https://oldgamebox.tistory.com/ )


남들이 올린 음악 파일을 열심히 다운로드 받다보니 문득 나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조금 해 보니 ‘비쥬얼 컴포저’라는 프로그램으로 음악 파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음악적 지식은 더더욱 없었지만,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악보의 우리 학교 교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허접한 수준의 중학교 교가를 만들어 자료실에 업로드하고 혼자서 성취감에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서울의 변두리 중학교 교가를 다운로드 받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쥬얼 컴포저 - Ad Lib Visual Composer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스캐너, 나모 웹에디터 그리고 포토샵


운이 좋게도 바라던 체육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농구동아리와 럭비부에서 운동을 정말 원없이 신나게 했다. 당시에 막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확산되면서 농구동아리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처음에 프리챌 커뮤니티로 쓰다가, ‘라이코스’에서 홈페이지를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고 하여 만들어 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나모웹에디터와 html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CGI 게시판 파일을 폴더째로 붙여넣기 등의 방법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디자인이었다. 텍스트로만 가득한 홈페이지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디자인 감각은 없지만, 우리의 사진과 폼나는 글씨는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났다. 사진은 스캔을 해서 파일로 만들었다. 파일로 만든 이미지를 그림판으로 편집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가면서 말로만 듣던 포토샵에 도전했다. 포토샵의 레이어 기능과 명도, 채도 등의 조절 기능은 신세계였다. 그렇게 허접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농구동아리에 공유했는데, 다들 애초에 기대감이 높지 않아서였는지 나름 잘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이 때 알게 된 ‘하이퍼링크’, ‘html 코드: img src=, embed= ’등의 개념은 오랫동안 잘 써먹은 것 같다.


나모 웹 에디터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프리미어, 동영상의 세계


대학생,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청년부였던 시절. 교회 영상부에 소속되어 영상편집하는 것을 하게 되었다. 누가 가르쳐 준 것은 없지만, 우리끼리 모여서 갑론을박하며 스토리보드도 만들면서 영상을 편집했다. 당시만 해도 동영상 작업의 반은 아날로그 방식이었기 때문에, 아날로그 VHS 테이프 또는 6mm 디지털 테이프 VCR로 녹화된 것을 PC의 캡쳐보드로 다시 녹화하여 파일로 만드는 작업부터 해야 했다. 영상 편집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단 몇 분짜리 영상의 렌더링을 2박 3일간 기다리는 경험, 2박 3일 후 오류메시지와 함께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야만했던 좌절 등 다양한 경험을 했었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영상 편집 프로그램의 기본 인터페이스는 당시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다. 아이무비, 곰믹스, VLUU 등의 간단한 영상편집 앱부터 베가스, 파이널컷 등의 복잡한 프로그램까지 비슷한 방식의 인터페이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때의 경험은 이후 교사가 되어서 영상을 편집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2000~2001년 쯤에 교회 영상부에서 사용했던 ‘Pinacle’사의 영상 캡쳐보드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2000년 쯤에 사용했었던 프리미어 6.0, 캡쳐보드를 구입할 때 번들로 제공되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글을 쓰다보니 나의 디지털 리터러시의 깊이가 참 얕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무엇인가 하고 싶을 때, 딱 필요한 만큼만 배워서 딱 필요한 만큼만 썼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것을 접할 때, 두려움이나 스트레스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세대는 다르지만, 요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문화 중 학습에 사용할만한 것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교육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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