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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의진 Sep 27. 2020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온 장학사의 세계, 그 미지의 영역

교육청에 들어와서 일 년, 나는 무엇을 했고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이 글은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을 하며 적응해 나가는 과정의 경험을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으로 기술한 내용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전문직원의 일반적인 문화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제 글로 인하여 교육전문직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가 생기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 명의 교사가 교육청에 들어가 장학사로 겪은 일들을 가볍게 풀어내는 글이라고 생각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졸필에 불과하지만, 제 글을 통하여 장학사라는 단어의 권위적인 이미지와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부감에서 벗어나, 역량 있는 교사들이 젊은 나이에 교육청에 들어와 대한민국 교육의 변화를 이끌어나가는데 동참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에서는 교육전문직원(장학사, 장학관, 교육연구사, 교육연구관)이라는 정식 용어가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친숙한 장학사라는 표현을 동의어처럼 사용하였음을 말씀드립니다.




  2019.9.1.부로 서울특별시중부교육지원청 중등교육지원과에서 체육, 문화예술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장학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엄밀히 구분하여 말하자면, 6개월의 기간 동안 ‘인턴장학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장학사면 장학사지, 인턴 장학사는 또 무엇인가?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나도 교육전문직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 내가 얼마나 사전 준비 없이 장학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턴장학사. 문자 그대로 장학사는 장학사인데 인턴이다. 예를 들면, 기존의 장학사가 다른 기관으로 파견을 가게 되거나 역량강화연수를 받게 되는 등의 장기간 공석 발생 시에는 정식 장학사 발령이 불가능하지만, 교육전문직원 임용대기자를 인턴장학사로 발령내어 장학사의 역할에 투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는 일은 장학사지만, 정식 발령은 받지 못한 교사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장학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인턴장학사라고 해서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정식 발령을 받은 장학사들과 완전히 동일한 일을 하고 동일한 책임을 지기에 무시를 당하는 것도 전혀 없다. 하지만, 학교에서 기간제교사를 해 본 사람이면 알 수 있는 바로 그 지점, 마음을 온전히 두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일은 하고 있지만, 업무적 역량을 쌓기에는 작은 시간이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며,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될 선배 장학사께서 세팅해 놓은 업무방식을 바꾸어 놓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닥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정말 놀랍게도 누구든 주어진 기간 동안에 어떻게든 그 일을 해내고 마는 놀라운 기적을 마주할 수 있다.


  인턴장학사 파견기간이 종료되면, 다음 인사발령 시즌에 맞추어 대부분 정식 장학사 발령을 받게 된다. 각 시도교육청에서는 매년 장학사를 필요한 인원만큼 선발하는데, 그 인원이라 함은 총 2~3회의 인사발령 시즌 동안 장학사로 발령을 내기 위한 인원의 수를 의미한다. 매년 상반기에 교육전문직원을 선발하면, 당해 학년도 9.1.자로 1차 발령, 다음 학년도 3.1.자로 2차 발령, 다음 학년도 9.1.자로 3차 발령(이 때는 새롭게 선발된 후배 장학사들 중 1차 발령 인원과 함께 발령을 받는 것임)을 내어 한 해에 선발한 교육전문직원의 전직 인사발령을 완료한다. 나는 바로 저 3차 발령 케이스로, 인턴만 1년을 하는 바로 그 케이스였다. 반면에, 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가 3차 발령을 통해서 곧바로 전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턴을 1년한 장학사라면 차라리 인턴 기간 없이 학교에서 즐겁게 대기하다가 발령받는 이러한 동기들을 부러워하는 경우도 많다. 인턴장학사로 1년을 근무한다는 것은, 경험한 사람들만 공감하는 나름의 고된 무게를 가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턴장학사 1년은 불운이었을까, 아니면 행운이었을까. 인턴장학사 기간이  후배를 보며 선배장학사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위로를  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힘든 장학사 생활을 똑같이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간을 장학사 근무기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면, 다시 전직을 할 때(교감 발령) 순서가 장학사 근무기간 경력순이기 때문에 같은 기수라도 전직 시점이 상대적으로 늦어진다는 이야기이며, 교육청 또는 직속기관에서 근무하는 기간이  많이 남게 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장학사 생활 초기에는 적응할 여유도 없이, 시작과 동시에 폭발하는 업무와 책임 속에서 허우적이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장학사로 정체성을 찾고 역량을 폭발시키는 원숙기에 접어든 선배들은 확실히 여유가 있고 안목과 통찰력이 있으며 교육의 큰 그림을 보고 필요한 포인트를 짚어가며 일을 하게 된다. 선배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후배들의 어려움이 눈에 보이고 느껴지기에 안타까움을 표현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장학사들이 자주 취하는 자세입니다. (출처: https://dangjin2618.tistory.com/13408)


  반대로 인턴장학사 기간이 길었다는 것은 발령 전에 실무 현장에서 역량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고, 더 많은 시간을 교육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교육청과 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숙련된 장학사가 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좋은 일인 것이다.




  6개월의 인턴 기간이 끝나가면서 다음 학기 인사발령일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교육전문직원(장학사, 장학관, 교육연구사, 교육연구관)의 인사발령은 교원(교사, 교감, 교장)의 전직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장학사들의 인사발령 역시 1년에 두 번, 3.1.자 인사발령과 9.1.자 인사발령 이렇게 이루어진다. 나는 9.1.자 인턴 발령을 받았으니 3.1.자 장학사 정식발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정식발령 대상자라는 연락을 받고 필요한 서류도 제출하라는 통지를 받았기에 당연히 발령이 날 것으로 생각했고, 체육 업무를 담당하는 선배 장학사님들의 인사이동을 생각하며 어디에 가고 싶다는 행복한 상상을 마음대로 하면서 1월을 보냈다.


2월 초, 기다렸던 전문직 인사발령에 내 이름은 없었다. 물론, 나뿐만은 아니었고 몇 몇 동기 장학사들이 함께 인턴을 반년 더 하게 되었다. 아. 이 생활을 반 년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가야 할 곳은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렇게 가게 된 곳은 현재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근무지, 내가 갈 수 있는 근무지 중 가장 가까운 출퇴근 거리의 교육지원청이었다. 이것은 새옹지마인가, 전화위복인가, 아무런 판단이 들지 않았다. '장학사라면 어디든 보내는 곳으로 가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수없이 들었던 말을 되뇌일 뿐.


  모두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업무, 학교폭력과 생활교육.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2020.3.1.자로 개정 시행되는 법률에 의해 이전까지는 없었던, 교육지원청이 새롭게 하게 된 바로 그 일,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운영, 바로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나였다. 새로운 업무를 담당하는 장학사가 늘 그렇듯이,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우당탕탕 반 년이 지났다. 엄청난 부담이었지만 그나마 마음에 여유가 있었던 것은, 11개 교육지원청 어느 곳에든지 우리 동기 장학사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편안하게 물어보고 소통하며 공감하고, 부족한 점을 매워나갈 수 있었다.


  시간은 또 다시 흘러...이번에는 반드시 발령이 날 수 밖에 없는 9.1.자 3차 발령일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무리 행복회로를 돌려봐도 내가 어디에 가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하던 일을 그 자리에서 계속 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반반이었다. 전문직 인사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기란 쉽지 않고, 나는 사실 내 근무지에 대한 희망도 특별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하던 일 그대로 내 자리 그대로에 정식 발령이 났다. 적응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자,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버티면서 적응해 왔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가장 두려웠던 디스크의 재발은 점심시간 산책으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는 중이다.  (출처: 양경수 작가 페이스북 '그림왕 양치기의 약치기 그림')




  장학사 생활 1년.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네시 반이 되면 온 몸의 생체시계가 불안해 하던 사람이, 여섯시에 퇴근하면 상쾌한 마음이 드는 사람이 되었다. 일곱시 반까지 출근하던 사람이, 여섯시 반까지 출근하게 되었다. 평생을 운동화와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던 사람이, 어설프기만 한 차림의 옷을 입고 다니게 되었다. 학부모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심장이 벌렁대던 사람이, 분단위 초단위로 울려대는 전화에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교감 선생님, 교장 선생님 근처에는 가지도 않던 사람이, 매일같이 교감 선생님들께 전화를 걸며 만나러 가고 있다. 최근 십여 년 간 가장 가벼운 몸무게를 기록했다가, 지금은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몸무게를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보니 참 많이 변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선배 장학사님의 조언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놓고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교사로서의 정체성은 가슴 속 깊숙히 넣고 학교를 지원하고 행정을 하는데 최선을 다 해라. 단, 그 정체성을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된다.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는 장학사 생활. 부족한 역량에 장학사로 살아가기 버겁지만, 그래도 지난 일년 동안 많이 배우고 성장한 것 같아 감사하다. 무한긍정, 장학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는데... 아직 내공이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부디, 내일은 우리 관내에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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