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서 교육전문직원으로의 전직, 후회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시각에서 쓴 글입니다. 과거의 기억이기에 미화된 측면도 많을 수 있습니다. 우연히 이 글을 읽게 되는 분이 계시다면...이러한 부분을 참고하여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교육청에 들어와 장학사 일을 한지도 벌써 만 일년을 넘어 두 번째 해가 끝났다. 지난 시간동안 가장 큰 고민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였다.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었기에 깊이있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에 미쳐 생각해보지 않은 일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제 더 이상 학생을 대상으로 체육 수업을 하는 사람이 아닌, 행정으로 교육을 지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유체이탈 식으로 과거의 행복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 교사 시절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경험을 했길래 그 시절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교사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을까. 장학사 생활 일년 반, 이제는 교사보다 꼰대에 가까워졌겠지만...그냥 교사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커졌지만, 그래도 교사로서 보낸 인생의 한 부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교사가 되기까지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늦가을 쯤. 나는 체육교육과에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께서는 워낙 운동을 좋아하던 아들이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셨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반가워하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아들이 하겠다고 하니 한 번 잘 해보라고 응원해 주겠다고 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녀를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교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철학적 주관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좋아하는 운동을 제대로 배워서 평생 즐기며 살 수 있는 직업이 체육 교사일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체육 교사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며 열심히 준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고, 운동도 정말 열심히 했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성실한 1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만큼 교사가 되고 싶었나보다.
고등학교 3학년 1년이 지나고 처음 꿈꾸었던 목표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고, 어떻게 보면 큰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겸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나는 내가 이미 체육 교사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었고, 교사가 되기 위하여 진지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다. 결국, 중등 체육 임용고사에 여러 차례 불합격하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식 발령 전에도 몇 년 동안 학교 현장에서 기간제 교사로 경험을 쌓기는 했다. 누군가는 기간제 교사 경험을 좋지 않은 기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로 한정했을 때, 나는 기간제 교사 몇 년의 경험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이를 통하여 오히려 임용고사에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일 년이면 할 공부를 몇 년에 걸쳐서 천천히 나누어 하는 기회비용이 있었다. 하지만, 기간제 교사 시절의 경험은 발령 이후의 학교생활에서도 큰 힘이 되었고, 지금도 장학사로서 학교를 바라보는 시각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작은 학교, 좋은 사람들
나의 최초 발령지는 서울의 한 중학교였다. 총 18학급, 학년별 6학급, 한 반 25명 정도, 남녀 성비는 1:1, 운동장 크기는 70mX40m 정도, 체육관은 없고, 탁구 수업이 가능한 작은 소강당이 있었다. 1학년 6학급 전체와 3학년 1학급의 체육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내가 담당하게 된 학년과 수업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대감이 생겼다. 한 학년을 나 혼자 통째로 담당한다는 것은 내가 교육과정과 평가계획을 다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발령 전에 기간제 교사 근무를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내가 만든 교육과정이 아닌 누군가 계획해 놓은 수업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정식 발령을 받으면 수업을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겠다 기대는 했지만, 발령을 받자마자 곧바로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신 선배님들이 자주 하시는 이야기처럼,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복을 많이 받아서인지, 기간제 교사로 근무한 곳에서도 그렇고, 지금까지 근무한 모든 곳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신규발령을 받은 곳에서 만난 선배님들도 모두 좋은 분들이었다. 단순히 인성적 측면을 넘어 체육 교사 선배로서도 배울 점이 참 많은 분들이었다. 수업이나 체육행사 등 다양한 부분에서 의견을 제시할 기회도 주셨고 서툴기만 한 초임교사를 믿어주고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다양한 수업들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 있었고, 정규 수업 외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가능했다.
첫번째 학교를 떠나야 할 시기 즈음에 근무하던 학교 바로 옆에 신설학교가 하나 생겼다. 산과 논 밖에 없던 위치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말 그대로 신설학교였다. 예나 지금이나 신설학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기에 일이 많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많은 교사들이 선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학교의 체육 교육을 온전하게 세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환경이었다. 개교 일 년차부터 가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의견을 드린 덕인지 개교 2년차에 초빙교사로 합류할 수 있었다.
학교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학교 구석구석의 공간을 찾아서 적절한 수업을 구상하고 학교체육 활성화 아이디어를 실제로 실현해보면서 다양한 노하우를 쌓을 수 있었다.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죽어있는 공간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배교사와 관리자의 응원과 지원 속에 나름대로 체육과 스포츠가 활성화 된 학교를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미있던 것은 [정규 체육 교과수업-교육과정 내 학교포츠클럽활동-교내스포츠리그와 체육대회-교육과정 외 학교스포츠클럽] 등이 연계되는 하나의 학교체육 활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학교체육 정책의 방향을 단위학교에서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며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발령 후 첫 두 학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배우며 학교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르치러 가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배우러 가는 학생과 같은 마음으로 출근을 했기에 즐거움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리 길지 않은 교직 경력을 통해 이렇게 다양한 경험들을 압축하여 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학교, 좋은 학교'가 아닌 '작은 학교, 좋은 사람들이 있는 학교'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나눔 그리고 연결
체육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후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 수업을 하며 행복했다. 좋은 교사가 되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좋은 수업은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종 연수를 많이 찾아다녔고, 좋은 수업을 했던 선배들의 흔적을 찾고 또 찾았다. 각 시도교육청 홈페이지, 교육부, 연구회 홈페이지, 교사 개인 블로그 등 다양한 곳에서 선배들의 노력을 간접적으로나마 하나하나 배울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텍스트 형태의 자료는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림이나 영상 등의 수업관련 자료는 온라인으로 공유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선배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찾아다니며 이동식 디스크에 자료를 복사해 오는 방법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대학교 때부터 모았던 주요 스포츠 경기 비디오 테잎이나 다큐멘터리 등의 자료도 틈틈히 디지털 자료로 변환하며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어느 날 부터인가 모아 둔 자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드디스크 안의 파일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교직을 떠나기 전까지 모두 활용할 수도 없는 양이었다. 나에게는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다른 선생님께는 꼭 필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영향력이 있는 교사도 아니었고 교사연구회를 열심히 하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교사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그랬듯이 인터넷의 세계에서 자료를 찾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다. 사진과 문서 자료는 네이버 블로그로 충분히 공유가 가능했다. 시간이 있을 때 간간히 자료를 올려두니 필요한 분들이 다녀간 흔적들이 쌓이기 시작했고 소통이 시작되었다. 학교도 지역도 다르지만 체육 수업으로 온라인 공간에서 연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의 대부분은 동영상 파일이었다. 나는 이 자료들을 활용하기 위하여 항상 외장하드 형태의 저장장치를 들고 다녔다. 하지만, 교실마다 다른 컴퓨터 활용 환경은 동일한 자료를 볼 때도 어려움이 있었다. 신체활동 중심의 체육 수업에서 영상을 재생하는 것도 어려웠고, 학생들에게 자료를 전달하는 것도 불편했다. 동영상 자료를 공유하기에는 당시의 포털사이트 클라우드 서비스나 동영상 플랫폼은 한계가 명확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YouTube)라는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쉽게 채널을 만들고 업로드 할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전용 플랫폼이었다. 유튜브라는 사이트에 누군가 업로드한 영상을 보기는 했었지만, 나만의 동영상 파일 저장소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유튜브만큼 편리한 영상 활용 방법이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튜브라고 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유튜브에도 동영상 길이가 15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동영상 길이 제한 없이 동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튜브를 나만의 영상 저장장치로 활용하기로 하였다. 당장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2011년의 일이었다.
유튜브는 데스크탑,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 등 어떤 기기로도 안정적으로 시청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검색 또는 링크를 통하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더 이상 영상 재생을 위한 환경을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출력물, 포스터 등에 QR코드를 삽입하는 것만으로도 영상을 수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수업은 풍성해졌고 가지고 있던 자료를 더 많이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유튜브에서 수업 영상을 보던 학생 중 하나가 내 유튜브 채널에 '구독자 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선생님들이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검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자료를 공유할 수는 없었지만, 공유가 가능한 범위에서 가지고 있는 파일들을 더 적극적으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다른 교사의 수업을 궁금해하기에 직무연수 등에서 수업을 나누었던 영상, 내가 했던 수업의 기록들을 가능한 범위에서 업로드하기도 하였다. 직접 만들어서 활용했던 자료들 역시 유튜브로 공유하였다.
블로그와 유튜브 십여 년. 단순한 공개에서 시작된 나눔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연결은 더 많은 만남과,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교사로서의 역량이 있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열심히 나누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 있어 나눔은 소진이 아닌 채움이었다.
미래교육을 만들어가는 교사들과의 만남
2014년, 미래학교 프론티어 교사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2015.3.1. 출범을 목표로 하는 '서울미래학교'의 수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체육 교사들과 함께, 미래의 체육 수업을 상상하며 이런 저런 자료들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의미있었던 것은 다른 교과 교사들과 만나서 마음껏 수업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각자 나름의 철학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수업을 나누고 개선하는 교사들과의 수업나눔은 교과의 경계를 넘어 열린 마음과 협력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여러 차례의 워크샵 등을 통하여 많은 선생님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자극이 되었다.
2015.3.1. 창덕여자중학교가 미래학교로 지정되어 미래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기 시작했다. 여자중학교, 적은 수의 학생, 열악한 체육교육 환경 등은 창덕여자중학교에 합류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존경하고 배우고 싶은 교사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다행스럽게도 체육 교과 인사이동에 맞추어, 2017년 3월에 미래학교 3년 차에 창덕여자중학교 체육 교과 교사로 합류할 수 있었다.
창덕여자중학교에서의 경험은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열린 회의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 과감하고 자신있는 수업 나눔과 반성, 다양한 교수학습방법과 과정중심평가, 소통과 휴식이 있는 공간 설계, 학생들의 적극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의 참여 등 현재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지향하고 있는 정책들이 대부분 실천되는 학교가 바로 창덕여자중학교였다. 동료 교사 한 명 한 명은 모두 서로에게 스승이었다. 짧은 2년의 시간이었지만 학교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출근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 배우러 가는 학생의 마음가짐으로 등교를 했었던 것 같다. 먼 거리의 출퇴근이었지만 즐거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창덕여자중학교에서의 경험은 교직 생활을 풍성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대한민국 어느 학교도 창덕여자중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과 같은 교사 구성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훌륭한 교사, 교감, 교장이 어떤 시기에 한 곳의 학교에서 만났고, 그 안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신기하게 전문직 선발시험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래의 체육 교육
미래학교 창덕여자중학교에 실제로 합류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을 고민하였다. 체육교육 측면으로만 봤을 때, 창덕여자중학교의 수업환경은 상대적으로 좋지 않은 곳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덕여자중학교에 합류해야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는, 미래교육과 미래수업의 실천현장에서 체육 교과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내가 뭐,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거나 원대한 꿈을 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무엇인가 부족해보여도 미래학교 이야기에 체육 교과도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창덕여자중학교에서 실천한 수업 하나하나는 서툴렀지만, 의미가 있었다. 평소에 생각했었지만 일반학교에서는 실천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정규 교육과정과 평가로 계획하여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업의 기록과 반성은 그 자체로 나눔의 자원이 되었다.
더 많이 더 자주 수업을 나누고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겨났다. 역량이 부족한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불러준 덕분에 생각과 경험을 나누며 배울 수 있었다. 운영하고 있던 블로그와 유튜브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체육 교재연구 및 지도법’ 정규 수업을 맡기도 했고, 다양한 연수 등에도 초청을 받았다. 인생의 버킷리스트였던 책 출판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겠지만,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준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 분명하다.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한 시간들이 지나갔다.
새로운 에너지를 찾아서
시간이 흐르면서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이 커져갔다. 부족한 역량으로 여기저기 가서 이야기를 하기도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나마 있던 경험들도 모두 고갈되었음을 느꼈다. 교사로서도 정체된 느낌이 있었고, 소진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나만의 틀과 공식 속에서 무한하게 자기복제되는 것에 되한 부끄러움도 컸다.
평화롭고 안정감있는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교육전문직원 선발계획 공문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관심있게 보지 않았던 공문인데, 왜인지 열어보게 되었고 여러가지 생각들로 연결되었다. 장학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해져 검색을 하고 선배들에게 전화를 하였다. 예년보다 많이 뽑는 인원에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의 동의였다. 장학사가 뭘 하는지는 몰라도 정말 일을 많이 하고 야근을 밥먹듯이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한창 자라나는 시기의 아이들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모든 일들은 전직 시험에 합격을 한 이후에야 문제가 될만한 고민이었다.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봤기에 나나 아내나 모두 합격 가능성을 낮게 보았고 큰 기대감 없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시작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웠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안 그래도 전문직에 도전해 보라는 이야기를 꺼내보려 했다며 응원해 주셨고, 교감 선생님께서는 내 의중을 아시기에 조용히 절차를 진행해 주셨다. 하지만, 제출하는 서류 중에는 이전 근무교의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고 연락을 드리면서 전적교 선생님들께서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가볍게 시작했지만, 주변에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하자 동기부여가 되었다. 짧은 시간에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준비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운이 좋게도 필기와 서류를 통과하고 면접과 실사의 기회가 주어졌다.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은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사라는 것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된 것이지만,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전문직 선발과정에서 실사는 정말 비중이 켰다. 구체적으로 공개된 것은 없지만, 나와 함께 근무한 수많은 교사들에게 은밀하게 의견을 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 동료교사에게 나는 어떤 동료교사였을지, 나를 책임지고 계셨던 교감, 교장님들은 나를 어떻게 보고 계셨을지...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였다.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느껴졌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도전이었지만, 이 단계까지 오고 나니 욕심도 났다.
2019년 6월의 어느 날. 선배 장학사로부터 축하 연락을 받았다. 합격이었다. 공문으로 서울특별시 모든 학교에 안내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래 전 잠시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부터 친하게 지냈던 선생님들까지 많은 분들께 축하 연락을 받았다. 축하를 받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내가 왜 합격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준비한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신데, 짧게 준비한 내가 합격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뭐가 뭔지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이제 교사로서 수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체육 수업을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니...내가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내려놓다니...내가 한 선택의 무게가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내려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이러한 마음으로 장학사 생활을 시작하다보니 교사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컸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을 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체육 교사였다는 자부심
2020년, 코로나가 뒤덮은 세상에서 체육 교사들은 큰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나는 학교현장을 떠나서 더이상 수업에 대한 고민을 해야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육 교사들의 고민이 느껴졌고, 이 시기에 내가 교육청에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혼자만의 착각도 들었다. 체육 수업에 대한 고민에 조금이나마 동참해 보고 싶었다. 언젠가 선배 장학사님이 "교사라는 정체성은 가슴에 계속 품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구나 싶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잠시나마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이름으로 학교체육진흥회를 통해 전국의 체육 교사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체육 수업이 가장 큰 위기를 겪는 시기에 장학사가 되면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으니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서로 적극적으로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소통하는 체육 교사들을 많이 만나면서 체육 교사였다는 자부심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교사에서 교육전문직원으로 전직을 하였지만, 나의 인사기록 카드의 가장 상단에는 '체육'이라는 교과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교사로서 부족한 점이 많았기에 후회와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체육 수업'을 후회없이 열심히 했던 것만은 맞는 것 같다. 부끄러운 순간도 많았지만, 체육 교사로서의 경험과 고민들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 든든한 자산이 되어주고 있다. 이제는 점점 꼰대로서의 사고방식이 커져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현장의 체육 교사들을 만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교육청을 떠나서 학교로 돌아가는 날까지, '체육 교사'들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들을 해보고 싶다. 아니, 담당 업무와 관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체성 찾기로 시작한 글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체육 교사여서 행복한 삶이었고, 앞으로도 체육 교사이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