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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n 27. 2023

음주 비행을 강행하는 기장

출구 없는 음주 고속도로를 달리는 엄마

 말레이시아에서 첫 어린이 집을 가게 된 아이를 위해 고르고 고른 학교는 쿠알라룸푸르 시내 한 복판에 있는 작은 사립학교였다. 주로 유아, 유치원, 저학년 위주의 학생이 다니는 이 학교는 몬테소리 교육법을 추구한다. 건물도 딱딱한 모양의 각진 신축이 아닌 빛바랜 겨자색의 벽과 버건디 색의 지붕을 얹은 외국 잡지에 나올 거 같은 매력적인 곳이었다. 오래전 스페인의 대사관으로 사용이 되었다고 했나 대사의 사택으로 사용되었다고 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큰 정원을 가운데에 끼고 쌍둥이처럼 생긴 두 채의 단독 주택이 마주 보는 자연 친화적인 공간이었다.


 모든 면에서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모습을 한 이 학교의 장점이자 단점은 한국 사람이 오직 나의 아이 한 명뿐이라는 것이었다. 영어를 습득하기엔 최적화된 환경이지만, 한국 친구는 사귈 수가 없었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그리스,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양한 국적의 엄마들과도 가까워졌지만 모두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술을 좋아하는 프랑스 엄마와 친해졌는데 그 이야기는 조만간 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술을 안 마시는 엄마들 덕분에 오히려 나는 혼자 마시는 술에 더 흠뻑 빠져들었던 거 같다. 같이 마실 사람은 없지만 마시고는 싶었다.


 그렇게 한국인 친구 없이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새로 이사 간 콘도에서도 1년을 오롯이 나 홀로 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술친구도 고팠지만 한국말로 실컷 수다를 떨고 싶기도 했다. 더 솔직하게는 술을 마시면서 언어의 제약 없이 떠들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국인이 거의 보이지 않던 우리 콘도에 뉴 페이스가 등장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수영장에서였다. 언제 말레이시아에 왔냐, 기러기냐, 언제까지 있을 거냐, 학교 어디냐 이런 탐색전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그녀가 나의 심장에 훅 들어오는 질문을 했다.


술 드세요?


 내가 들어본 그 어떤 질문보다도 반가운 그 질문 "술 드세요?".

찌릿하게 정신의 주파수가 통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자리에서 술 약속을 잡아 우리 집에서 첫 술 파티가 벌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 사람과의 술자리, 그녀도 소주를 좋아한단다. 만남은 한층 더 짙은 반가움이 된다.


 그날 우리가 마신 소주가 몇 병이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오래돼서 기억이 안나는 거라고 해두겠다. 그렇게 서로의 집을 오가며 낮에는 맥주 한 두 캔, 주말에는 소주를 돌아가며 마시던 어느 날.


 비가 억수로 퍼붓는 오후에 한인슈퍼에서 사 온 대패 삼겹살을 굽고 된장국을 끓이다가 문득 그녀에게 같이 저녁 먹을래냐고 카톡으로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아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넘어왔다.


 우리의 입은 수다로 쉬지 않고 손은 부지런히 입으로 술을 날랐다. 결국 집에 있는 술이 떨어졌다.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다음을 기약하고 정리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고장 난 브레이크는 출구 없는 고속도로를 내달리도록 종용했고 야심한 밤에 아이들 손을 잡고 콘도 옆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술을 한 아름 들고 와 끝장을 내고야 말았다.


 치명적인 사실은 그날이 평일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음 날 학교에 가야 했다. 여명이 밝았고 엄마들은 떡이 된 채 침대에 늘어 붙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결석을 했다. 나의 아이가 유치원, 그 집 아이가 1학년이었다. 하루쯤 결석한다고 인생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석의 이유가 참담했다.


 대학생일 때나 직장을 다닐 때 술 먹고 다음날 일어날 수가 없어서 결석이나 결근을 한 경험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것과 이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는 나의 음주로 인해 타인인 아이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양육자로서의 책임감이 술에 희석되어 버렸다.


 그녀와 나는 그날 늦은 점심에 다시 만나 한식당에 가서 성의 없는 해장 겸 식사를 했다. 우리는 따로 그 문제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지만, 둘 다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특히나 같이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른바 술친구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술을 안 마시는 상태에서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술만 한 잔 들어갔다 하면 그렇게도 막역한 사이가 없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올라갈수록 우정도 농밀해진다. 놀라운 것은 이 진한 우정의 정체는 다음날 술이 깨면 신데렐라의 12시 법칙처럼 리셋이 된다는 것이다. 서먹하고 어제 내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했더라도 저 사람이 기억은 하려나 싶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단지 그날의 사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녀와 나는 그날 이후로 누구도 술을 먹자고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의 술문제는 차치하고 나만 본다면 완전하게 술에 지배를 당했다. 자기 통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만 실제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는 희박하다. 자기 통제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자기를 통제하는 것의 어려움은 이미 성서에도 나와 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19)


 술을 한 잔 마시고 멈출 수 없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 잔의 술이 입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 위로 들어간 뒤 위벽으로 흡수된 알코올은 빠르게 뇌로 전진한다. SWAT팀처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전두엽에 침투한 알코올은 능수능란하게 인간 행동의 통제를 담당하고 있는 전전두엽을 통제한다. 술이 전전두엽에 이르는 시간이 어떤 정신과 의사는 단 6초라고 하고 어떤 정신과 의사는 6분이라고 한다. 어쨌든 일주일 뒤는 아니다.


 술, 마약, 도박, 게임이 중독이 잘 되는 것은 바로 즉각적인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도박 중독 전문의였던 신영철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술을 먹는데 일주일 뒤에 취하고, 경마장에 가서 내가 배팅한 말이 한 달 뒤에 들어오고, 화투 한 판 치는 데 3시간이 걸리면 아무도 중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핵심은 '즉각적인 보상'이다.


 술의 경우 알코올이라는 화학물질이 전전두엽에 침투하여 자기 통제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므로 이미 의지의 문제를 넘어선다. 한 잔의 술을 시작으로 쾌감을 얻을 수 있다면 다음 날 숙취와 결석의 피해 상황이 초래되더라도 나는 오늘 온몸을 술로 적시겠다는 의지만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기 통제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그릇된 신념과 잘못된 선택이 모여서 나타나는 것이다.

 

 평소에 아이를 위해 성실하게 살고 술을 좀 즐긴다고 해서 아이한테 해를 끼친 적이 없다고 늘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오만한 자신감은 사고로 직결된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여 결국 큰 사고를 낸 어떤 기장의 이야기를 다룬 좋은 예가 있다.


영화 <플라이트>에는 비행 실력은 출중하지만 사생활은 다른 방면으로 출중한 기장 휘터커가 나온다.

그는 비행 전날 스튜어디스인 애인과 진냥 술을 퍼마시며 불타는 밤을 보낸다. 다음날이 되자 휘터커는 지독한 숙취를 진정시키기 위해 해장술을 마시고 약까지 한 상태로 비행기를 조종한다. 술이 깨면서 몸이 힘들어지자 그는 숨겨간  술을 오렌지 주스에 타서 마신다. 그리고 결국 비행기는 비상착륙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같은 비행기에 탄 여자친구는 사망했고, 음주 비행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기내에서 발견된 술병을 여자친구가 마신 것으로 덮어씌우기 직전에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시인하고 죗값을 치르게 된다.


 승객들이 비행기에 탑승할 때 오로지 기장 하나만을 믿는다. 목숨을 기장한테 맏기고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다. 아이는 모든 것을 엄마에게 의지하는 승객이고 엄마는 책임감 있는 비행을 해야 하는 기장이다. 창 밖에는 비가 퍼붓고 주방에는 삼겹살 기름이 퍼붓던 그날, 나는 나에게 술을 퍼부은 음주 기장이었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술의 끌어당김을 거부하지 못하고 책임과 의무를 뒷전으로 한 채 온몸을 내맡겨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이 음주의 고속도로에서 과연 나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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