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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n 22. 2023

아이가 잠든 사이

내가 톰슨가젤처럼 달린 이유

 말레이시아의 첫 집은 방이 하나에 거실이 대로변을 향한 새로 오픈한 세련된 콘도였다. ‘대로변을 향한’을 글자 크기 20 정도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 이유는 교통 소음 때문이다.    

  

 차만 다녀도 충분히 시끄러울 왕복 4차선에 교차로가 있는 큰 도로인데 오토바이 천국인 동남아에서 대로변을 마주하는 거실과 침실은 정말 소음 공해의 최전선이었다.     

 

 사거리에서 출발을 대기하는 성난 황소의 콧김 같은 훙훙 소리에 이어 신호가 바뀌자마자 수 십 대의 오토바이들이 엔진의 파열음을 내며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게다가 일명 ‘썩은 버스’라고 이름을 붙인 곧 주저앉을 거 같은 낡은 버스는 녹색 불로 바뀔 때마다 폭발적인 검은 매연을 뿜으며 우렁차게 출발했다. 아침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나의 뇌는 늘 마비 상태였다. 창문을 열고 욕이라도 한바탕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소음에 유독 취약한 나는 낮에는 쇼핑몰이나 다른 곳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저녁에 거실에 평온하게 앉아있기는 불가능했다. 퇴근 시간이 되면 지옥의 아비규환 같은 모터음들로 온 집안이 울려댔다. 고막을 때리는 소음들은 내 변연계의 활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고 화가 났다. 그때 긴급한 진화를 도와줄 이완제가 있었으니 바로 술이었다.                




 술은 우리 뇌에서 항 불안제인 벤조디아제핀과 같은 작용을 한다. 벤조디아제핀은 불안 증세를 줄이고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시켜 준다. 짜증, 신경질, 초조함, 불안과 같은 불편한 감정들을 빠르게 진정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뇌의 신경세포에서 GABA(감마-아미노뷰티르 산)라는 신경전달물질의 효과를 증가하게 하여 긴장 완화와 기분 좋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술을 한두 잔 마셨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바로 이 GABA의 증가 때문이다.      


 하지만 통제력을 조절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기도록 술을 마시면 그다음부터는 연가시가 물로 사람을 이끌듯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절로 술을 찾아 헤매게 된다. 술은 조절이 가능한 사람에게는 디오니소스의 선물과도 같은 좋은 이완제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질이 나쁜 진정제인 셈이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나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술을 마시는 것을 ‘자가 처방 음주’라고 한다. 벤조디아제핀과 같은 약은 정신과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구입이 가능한 것이지만 술은 언제, 어디에서든 돈만 내면 쉽게 구할 수 있다.      


 이렇게 구하기 쉬운 항 불안제인 술을 마치 소화제나 해열제처럼 집안에 상비약으로 구비를 해 놓아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나 같은 알코올 중독자들이다.     

 



 어느 주말, 아이는 일찌감치 잠이 들었고 이상하게 평소보다 맥주가 더 들어가는 밤이었다. 이럴 때 불안한 예감은 왜 꼭 적중하는 건지,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 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몇 번을 들여다 보아도 역시나 더 사다 놓은 술이 없었다.      


 밖은 이미 깜깜했고, 시계를 보니 슈퍼가 문을 닫기 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내가 사는 콘도 바로 옆에 작은 몰이 있었고 그 지하에 술을 파는 슈퍼가 있다. 뛰어서 갔다 오면 10분 컷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혹시 그 사이에 아이가 깨서 엄마를 찾으면 어떻게 하지? 분명히 엄청 울고 충격받을 텐데.   

        

 갈등이 된다. 현관문과 거실 사이를 서성이며 사러 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 이때 알아봤어야 한다. 이미 뇌가 술에 옹골차게 지배를 당한 상태라는 걸.


 커다란 시계가 내 얼굴에 오버랩된다. 초침이 척척척 일초씩 내 얼굴을 가로지르고 동공이 흔들린다. 점점 더 초조해진다. 망설이다가 슈퍼가 문을 닫으면 술을 구할 곳이 없어진다.      


 이 밤, 이렇게 어설프게 술을 마시면 잠도 안 올 것이다. 입이 바짝 마르면서 속이 타들어간다. 스스로 이런 비합리적인 이유로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방에 들어가 아이의 숙면도가 몇 퍼센트 정도인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자고 있는 아이의 가슴에 살포시 손을 얹어 본다.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면 아이가 깰까 봐 초 긴장 상태로 조심한다. 숨결을 체크해 본다. 새근새근 곤히 잘 자는 상태로 봐서는......      


‘바로 지금이야!!!!’      


 나는 톰슨가젤이 초원에서 사자에게 쫓기기 시작하는 순간의 스프린트와 같은 속도로 지갑을 들고 슈퍼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미 전작이 있어서 심장이 두근 거리는 데, 아이가 깰까 봐 긴장도는 상승하고 아드레날린 수치가 최대치를 찍고 있다.      


 심장이 튀어나와도 주워 담지 못할 속도로 나는 계속 달렸다. 거침없이 술 코너로 달려들어가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6개 묶음의 맥주를 낚아채서 순식간에 계산을 하고 다시 뛰었다.      


 슈베르트의 곡 마왕에서 아버지는 아픈 아이를 품에 안고 말을 달렸지만 나는 맥주 여섯 캔을 품에 안고 적도 위를 내달린다. 콘도 로비의 투명한 문을 거세게 밀치고 들어온 나는 진정되지 않는 다급한 마음 때문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조차 제자리걸음으로 뛴다.     

 

 엘리베이터 안의 LED 창에 화살표가 오늘따라 왜 이리도 갑갑하게 느린 걸까. 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채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문틈을 비집고 뛰어나와 집의 현관에 도착한다.


 일단 조용하다. 열쇠를 돌리고 조심조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행히 아이는 깨지 않고 계속 자고 있었다.      

     

 온몸의 힘이 쭈욱 빠지고 안도의 한숨이 “푹” 갈증 나는 마른 소리를 낸다. 식탁 위에 올려놓은 6캔이 들은 종이 포장을 부욱 뜯어 맥주를 한 캔 따, 선 채로 벌컥벌컥 들이부었다. 효과 빠른 진정제의 힘으로 과도하게 활성화된 교감신경이 순식간에 진화가 되는 순간이다.


 앞으로 5캔 정도면 이 밤은 잘 넘어갈 수 있겠다는 충족감도 들고 맥주의 알싸한 탄산을 느끼는 입은 만족하는데 마음속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연가시의 숙주가 되어버린 찜찜한 기분이었다.     


 남편이 방에서 자는 동안 불륜남이랑 애정행각을 벌이려고 옆 건물 호텔에 갔다 온 정신 나간 여자나 나의 그 밤의 행동이나 무엇이 다른가.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질주의 대상이 생명체냐 물체냐일 뿐이다.   

   

 그날의 몰상식한 원맨쇼 소동이 어지간히 마음의 짐이 되었던지 다행히도 나의 이런 위험천만한 질주는 이 날 하루로 끝을 냈다. 또다시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간 동안 술을 더 많이 사다 놓기로 결심하게 된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면 슈퍼에서 장을 본 영수증 가격의 절반 이상이 술 값으로 찍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비약 창고에 진정제인 술을 가득 채워놓아 언제든 필요할 때 투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나의 짜증, 초조, 불안, 스트레스 오로지 술로만 다스려 왔고 그 방법 외에는 알지도 못한다.


 나의 얼굴을 한 개미들이 맥주를 한 캔씩 등에 지고 일렬로 슈퍼에서 나의 집 냉장고로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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