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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4. 2023

도망칠 용기

<모래의 여자> 속에서 중독 탈출을 보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일본의 카프카라고 불리는 아베 코보 작가의 1962년 작 <모래의 여자> 도입부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e-book이 없어서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와 잘 쓰인 책 리뷰들이 있어 이것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줄거리 요약 

- 스포주의(유튜브 영화소개 채널을 아래 첨부)  

        

학교 선생인 준페이는 희귀한 곤충을 찾아내어 곤충 도감에 이름을 올리는 꿈이 있다. 곤충을 찾아 다니는 것이 일상의 유일한 도피처이다. 열악한 환경에 사는 곤충일수록 희귀종일 거라는 믿음으로 해안가 모래 마을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막차가 끊겼다며 선심을 베푸는 마을 사람을 따라가 한 여자가 살고 있는 깊은 구덩이 속의 집에 신세를 지게 된다.     

 

사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계략으로 그는 그곳에서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내는 일을 해야만 한다.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무너져 내리는 모래에 집이 깔리게 되기 때문이다. 한 집이 붕괴되면 마을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다.    

  

마을 사람들은 물, 음식, 술을 정기적으로 배급하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 배급을 중단한다. 준페이와 여자는 극심한 갈증과 허기를 해소하기 위해 모래를 퍼내야만 한다.      


사다리가 없이는 올라갈 수 없는 구덩이 속에서 ‘일상’에 익숙해져 갈 무렵, 준페이는 우연히 유수 장치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준페이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태아가 잘못되어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때 준페이는 탈출의 기회를 포착한다. 하지만 구덩이를 나가 바다를 보고 깊은 생각에 빠진 그는 다시 자신의 구덩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자신은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유수 장치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준페이가 6년째 실종자 명단에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구속은 자유보다 편안함을 제공한다. 아주 쉬운 예로 교복을 들 수 있다. 교복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은 구속이지만 아침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제공한다. 


나는 47분에 달하는 영화의 요약을 보고 보고 중독자의 시각으로 모래에서의 탈출을 생각하게 되었다. 


일상의 무료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찾은 새로운 곳에서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것. 스트레스, 지루함, 우울 등을 달래기 위해서 찾아간 술에 엉뚱하게 갇혀버린 나의 모습과 수많은 중독자들이 떠올랐다.     


중독이 되기까지는 밀월 기간이 존재한다. 단 한 번의 폭음으로 중독자의 길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제어장치가 망가지지 않아 조절이 되는 기간이 5년에서 10년 정도 이어진다.      


준페이도 새로운 곤충을 찾아 떠난 첫날에 모래 마을에 갇히지 않았다. 반복되는 탐사의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탈출구가 없는 구덩이 안에 갇혀버리게 된 것이다.      


영화 안에서 마을 사람들이 노동의 대가로, 아니 준페이와 여자를 조종하기 위해 배급하는 술과 담배는 바깥세상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즐기는 기호품이다. 쾌감을 주는 것은 안과 밖이 결국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떤 것이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반복하고 싶어 하는 것과 그것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반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한낮의 우울- 6.중독>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재미’를 추구한다. 쾌감을 주는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쾌감을 얻지 못함에도 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중독은 결국 그렇게 벗어나고자 했던 ‘고통스러운 반복’을 하나 더 추가하는 꼴이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사용한 용어인 파라노이아와 스키조프레니아를 알코올 중독에 대입해 보면,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키조프레니아 형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아사다 아키라의 저서 <도주론>에서 파라노이아형은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위기의 상황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는 이런 ‘정주하는 사람’ 대신 ‘도망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분명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아도 지금 있는 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일단 움직이는 것이 스키조프레니아형 인간의 특징이다.     


내가 오랜 기간 술 문제로 고민을 할 때마다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은 “네가 무슨 알코올 중독이야, 마실 수 있을 때 실컷 마셔.”, “혼술은 하지 말고 나랑 만날 때만 마셔. 너 없이 무슨 재미로 술을 마시겠니.”와 같은 말을 했다. 나의 고민은 번번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평가절하 당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음주 습관이 너무나 위험하다고 느꼈고 더 이상 달콤한 회유에 기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칠 결심을 했다.      


주위에서 아직 괜찮다고 안심시키더라도 스스로 위험하다는 느낌이 들면 바로 도망쳐라. 이때 중요한 것은 위험하다고 느끼는 안테나의 감도와, 도망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다. 도망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용기가 있기에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술, 담배와 같은 중독 물질뿐만 아니라 나에게 해로운 인간관계, 의존성, 건강하지 못한 습관들을 타성에 젖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칠 용기가 필요하다. 윈스턴 처칠은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추구하는 극락 같은 재미는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재미를 추구하다가 지옥을 맛볼 수는 있다. 지금 술을 끊은 상태에서는 정주靜住하는 파라노이아형 인간이 되어도 괜찮다. 


소설 첫 머리에 나오는 문장을 다시 보면, 내 삶은 중독이라는 벌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느끼는 삶이 되어버렸다. 




표지 그림 :  씨네 21, 영화 <모래의 여자>의 한 장면


참고자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33. 재빨리 도망칠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


파라노이아 : 편집증. 아이덴티티에 집착. oo대학교 졸업 - oo 대기업 근무 - oo 동네에 살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집착. 일관성 있고 알기 쉬운 인격과 인생. 


스키조프레니아 : 고정적 아이덴티티에 속박되지 않음. 자신의 직감대로 움직이고 과거에 축적한 아이덴티티와의 정합성을 고려하지 않음. 


유튜브 영화 리뷰 채널 

https://youtu.be/w24y2wwOTTA?si=pD3dYwz1v7oVBs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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