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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06. 2023

해마, 추락하다

기억나지 않는 음주통화에 대해서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너무나 반가웠던 것은 도서관에 한국책이 비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지역 도서관 뽀개기를 통해 한국책 비치 현황을 조사를 해 봤는데 우리 동네는 한국책이 제법 많은 편에 속했다. 귀국하기 전에 서가에 있는 책만 다 읽어도 성공한 캐나다 라이프라고 생각했다. 


그 책이 그 책이 되어가는 무렵 다른 지점의 한국책이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11>이었고 윤고은, 권여선, 김숨, 성석제 등 작가의 이름만 보고 무조건 재미보장이라는 생각에 집으로 들고 왔다. 제12회 수상작은 윤고은 작가의 '해마, 날다'였다. 


책이든 영화든 아무런 정보 없이 들이대는 걸 좋아하기에 소설의 내용을 전혀 몰랐다. 해마가 바다에 사는 그 '해마'를 은유적으로 차용했을 거라고 예상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응?' 하며 웃음이 터졌다. 



사용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이상이면 발신이 정지되는 휴대폰이 등장했다. 



소설의 첫 문장이었다. 대충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갔다. 음주 통화에 대한 이야기이겠구나. (오늘은 스포 없음) 


진성 알코올 중독이 되면 다른 사람과 함께 술 마시는 것이 불편해진다. 앞에 앉은 사람과 대화도 해야 하고, 술 마시는 템포도 맞춰야 하고, 집에도 가야 하고 성가신 일이 늘어난다. 사람이 걸리적거려서 혼술을 선호하면서도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면 누군가와 대화가 하고 싶어 진다. 알코올이 세로토닌 수치를 다운시켜 외로움을 북돋고 전전두엽의 판단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카톡도 좋지만 취한 상태에서 자판 누르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냥 내 입과 혀를 움직여서 발성을 하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술의 힘을 빌려 평소에는 일절 연락 안 하던 친구에게 호기롭게 연락해 볼 좋은 기회이다. 하지만 친구를 잃을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음주통화를 시도한 사람은 말레이시아에서 친해진 언니이다. 동갑내기 아들을 키우고 있고 여러 상황이 비슷한 점이 많아서 서로 참 좋아했다. 


22년 7월, 캠핑을 간 나는 챙겨간 각종 주류를 섭렵하고 아이를 재웠다. 투둑투둑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추가 음주의 욕구를 막지 못했고 소주를 한 병 더 따서 홀짝거리며 언니에게 보이스톡을 했다. 


그렇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딱 한 장면이 해마에 입력이 되었는데, 내가 말을 하다가 말이 길을 잃었고 이 '수상쩍음을 전화기 너머에서 감지했다'는 것을 다시 내가 감지한 장면이다. 


해마는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이다. 기억의 입력뿐 아니라 기억을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분류하는 일도 한다. 술은 그런 해마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이 마비 현상을 우리는 '블랙아웃', '필름 끊김'이라고 부른다. 


소설 '해마, 날다'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주변인에게 전화로 횡설수설하는 것을 대신 받아주는 콜센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통화료가 조금 비싸긴 하지만 환산하기 힘든 손절 비용을 생각해 보면 통화 금액을 불평할 일은 아닌 거 같다. 


망각의 강 레테 위를 유영하며 나눈 대화는 그대로 강물을 따라 흘러가버린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통화 목록을 확인하면 술에 젖은 초라한 모습의 내가 남아있다. 아무리 쥐어짜도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곤혹스럽다. 오래전에 술만 취하면 나한테 전화해서 의미불명의 욕지거리를 해대던 친구가 있었다. 물론 손절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는 욕은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음주 통화 후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면 별 시답잖은 얘기만 나눴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술을 마시고 나누는 즐거운 대화의 유효기간은 너무나 짧다. 나도 기억 못 하고 상대도 기억 못 할 때면 인생에서 어느 한 부분이 통째로 도려져 나간 기분이 든다. 


술을 끊고 생긴 큰 변화 중 하나는 친구들과의 통화가 현격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종종 카톡으로 생사여부만 확인할 뿐 이러쿵저러쿵 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쁜 친구들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음주 통화로 갉아먹었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당신에게 할 말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알코올이 나의 베르니케 영역에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혀가 자꾸 꼬부라진다. 브로카 영역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감정적이 된다. 변연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암전, 필름이 끊긴다. 해마, 해마가 아프기 때문이다. 

<해마, 날다> 중에서


나의 마지막 음주 통화 희생양이 된 말레이시아 언니에게 오늘은 연락을 해 봐야겠다. 작년의 일을 언니가 기억을 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몇 번 정도 그녀의 시간을 훔쳐간 것을 사과해야겠다. 


그리고 윤고은 작가의 음주통화 콜센터는 사업 아이디어로 정말 괜찮은 거 같다. 어쨌든 오늘도 누군가는 술에 취해 통화를 하며 다른 이의 시간을 슬쩍하고 있을 테니까. 





표지그림 : Seahorse : The Shyest Fish in the Sea , Chris Butterworth / John Lawrence(I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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