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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02. 2023

상황의 해석은 선택이다

본질은 소명과 사명감

사람들은 모두 매일 판단하고 결정한다. 


상황을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디폴트 값이라고 놓았을 때, 그 상황을 해석하고 화를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 화를 낸다면 몇 퍼센트 정도 낼 것인지의 영역은 나의 선택이다. 감정을 선택하기 이전에 상황에 대한 해석이 먼저이다. 해석은 내가 갖고 있는 신념과 가치관등이 작용을 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해석하는 것 역시 해석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 정보값의 도출이다. 


편향의 결과는 때로는 오류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나는 지금도 단주 커뮤니티에서 맹렬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중독을 극복하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한 글, 나의 경험담을 나누거나 전문가들의 책을 요약해서 글을 올린다. 텀이 짧으면 이틀에 한 편, 길면 일주일에 한 편 정도의 글을 작성한다. 이전에 올렸던 잡담 같은 글이나 별말 없이 음악만 올린 글들을 정리를 하고 나니 180개가 넘는 글이 현재 남아있다. 


어느 날 커뮤니티의 A라는 고인 물로부터 내가 아직도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중독을 탐구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는 댓글을 받았다. 나에게 하루빨리 벗어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거의 같은 날, 같은 커뮤니티에서 B라는 회원으로부터 나의 봉사 정신에 탄복 한다며 감사하다는 댓글을 받았다. 나는 하나의 아이디, 하나의 닉네임으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분열된 글을 작성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이 두 해석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상황에 대한 해석은 개인의 선택이 맞는구나!!


우선 나는 이번 단주를 시작할 때 완벽하게 술에 백기를 던졌다. 물론 중간중간 슬며시 술 생각이 든 날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술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내가 단주 커뮤니티에 중독과 심리, 중독의 유전, 정신건강과 중독 등과 관련된 글을 쓸 때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시작은 다사랑병원에서 제작한 중독 전문 교수님들의 영상 요약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뇌를 위한 행동이었다. 일종의 셀프 재활치료의 목적이었다.  


어쩌면 A가 맞을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중독의 질긴 고리에서 벗어나질 못해서 여전히 중독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B가 말한 것처럼 중독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전달하려는 봉사의 정신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좋아요'에 중독된 인정 욕구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아니길 바라지만 1%도 없다고는 못하겠다.'좋아요'는 받으면 좋아요.) 


A회원은 술을 끊기 위해 몸부림치는 많은 사람을 오랜 시간 봐 왔을 것이다. 글을 퍼다 나르고, 열심히 일기와 댓글을 쓰는 사람들. 그러다가 한두 해 술을 끊고 다시 술로 돌아간 수많은 사람들을 말이다. A에게는 끊임없이 술에 대한 성찰을 하는 사람은 술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라는 가치관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합리적인 경험과 확률로 나의 맥락을 추정한 것이다.  


B회원은 아마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을 주로 하는 성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A회원이 목격한 가슴 아픈 일을 현저하게 적은 횟수로 경험했을 것이다. 또한 봉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고 스스로 실천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른 사람이 꺼리는 회사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거나 직접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거나.


인터넷 공간은 개인의 아주 특정한 맥락 일부분만을 공유하는 곳이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의 인품이 보인다고 하는 말도 맞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일부분이다. 


융은 페르소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사회생활을 하기에 유리하다고 했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내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페르소나 조차도 타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사람들은 남의 시선과 판단에 의연해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 사람의 커뮤니티 활동의 맥락이 이렇게 극과 극의 상반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흥미롭다. 단주 커뮤니티에서 나를 구독하고 있는 회원의 수가 지금 이 순간 50명이다. 이 특수한 목적의 커뮤니티에 가입한 50명의 회원이 나의 육아 일기나, 캐나다 생활 일기를 보려고 구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일종의 소명의식을 느끼고 사명감을 갖고 있다. 보다 나은 양질의 정보를 전달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구독자가 14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이다. 그러니까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의도적으로 중독과 관련된 글을 써서 올린 것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면서 말이다. 


모든 사람이 나의 진심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다. 적어도 단주 커뮤니티에서는 나의 글이 유용한 정보가 되길 바랄 뿐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글을 읽고 중독에 대해 이해하고 극복하기 위한 동기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감사한다. 


수많은 회복자들이 다른 중독자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녹아들어가고 있는 중일 뿐이다. 






표지그림 : 알베르트 조셉 무어 (1879/1881), 꿈꾸는 사람들, 그림 속의 사람들은 비록 몸은 같은 방에 있지만 마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박스 안 글 : <지혜의 심리학>, 김경일


(시험공부한다고 커뮤니티에 선포 해 놓고 브런치에 글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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