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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Dec 21. 2023

슈만의 마음, 내 마음

   

요새 하농 연습하세요?     




바흐의 신포니아 15번을 치는 나의 손을 보시던 선생님이 5번 손가락이 질질 끌려다닌다고 지적하신다. 곧바로 이어진 질문. "요새 하농 연습하세요?"


선생님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톡 와닿자 나의 어깨가 미모사의 잎처럼 움츠러든다. 



손가락 4번 5번은 근육은 연결되어 있어서 둘의 완벽한 독립이 쉽지 않다. 유난히 나의 4번 5번 손가락은 분리불안이 심각하다. 엄마 껌딱지 아이처럼 꼭 같이 붙어 다니려고만 한다. 유튜브에 올라온 손가락 독립운동 영상을 보고 따라한 적이 있다. 일주일만 해도 독립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연습을 하는 동안 혹시 내 손가락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이 올라온다. 결국 일주일을 못 채웠다.   

   

언제 마지막으로 하농을 연습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피아노 연습을 '즐기는 마음으로 기꺼이 하는 날'은 ‘곡’을 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준비운동 없이 바로 곡으로 다이빙한다.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 한동안 글쓰기의 재미에 푹 빠져서 피아노를 등한시했다. 몇 달을 꼬박꼬박 빚을 갚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쳐 가야 하는 숙제를 때우듯이 쳤다. 


어느 날도 여유 있게 손가락의 독립운동을 시켜준 적이 없다.    

  

근육의 팔짱을 꼭 끼고 세트로 다니는 4번과 5번 손가락을 볼 때마다 나는 슈만을 떠올린다.     

 

슈만은 피아노의 재능에 두각을 나타냈고, 잘 키우면(?) 당시 3대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를 거라는 유망 기대주였다. 사람의 인체 구성은 슈만이나 나나 기본적으로 똑같았다. 슈만도 손가락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다. 당시에 독립적인 손가락을 만들기 위해 손가락 훈련기계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슈만은 특히나 4번 손가락을 집중 공략했고, 무리한 훈련은 부상으로 이어졌다. 결국 손의 마비로 인해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게 된 슈만은 작곡과 비평가의 길을 걸으며 음악의 곁을 지켰다.      


슈만이 손가락 부상을 입은 것이 22살 때이고 슈만이 세상을 떠난 건, 그의 나이 46살이다. 그렇게 주옥같은 피아노곡들을 작곡하면서 본인이 치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강했을지 상상 그 이상일 것이다. 

     

요즘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을 자주 듣는다. 피아노 레슨이 있는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선생님 댁으로 가기 전에 잠시 들른 곳에서 우회전 한 번 잘못했다가 고속도로를 타 버렸다. 레슨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왔고 나는 고속도로 한 복판에서 달리고 있는데 차 안에는 슈만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각하는 레슨생의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하는 곡이 있을까 싶다. 1악장은 고속도로에 올라간 패닉 - 2악장 체념, 받아들이기 - 3악장 선생님 집에 거의 다다른 급한 마음.

 

우여곡절 끝에 차를 돌렸지만 15분이라는 지각 참사가 일어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속이 타고 피아노 위에서는 분리불안의 손가락이 애달프다.     

 

하농을 매일 준비운동 하듯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오랜만에 하농을 펼쳤다. 3-4-5 손가락 연습 페이지를 펼치고 손가락을 굴려본다. 역시나 4-5 손가락이 더 굳어있는 느낌이 난다. 중뿔난 사람처럼 ‘파’를 안 치고 자꾸만 ‘미’를 친다. 미치지 말자....?

 

무엇을 하든 준비운동은 기본이다. 수영 선수가 되었다고 준비운동을 안 하고 바로 접영 하지 않는다. 아나운서들도 본방에 앞서 대기실에서 끝없이 입을 움직여 풀어준다.      


자꾸 쓰면 발전하고 안 쓰면 퇴보한다. 굳기 전에 스트레칭해서 내전근을 늘려주자. 열린 마음이 될 수 있게 개방성을 유지하도록 이해를 연습하자. 4번 5번 손가락도 더 신경 써서 늘려주고 움직여주자.      


1856년 7월 29일 오후 4시 슈만은 4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슈만의 마지막 말은 meine..., ich kenne(나의..., 나는 알아)였다.*     


슈만은 무엇을 알았다고 말한 것이었을까. 


적어도 지금 나는 안다. 


매일 피아노 연습 전에 하농을 꼭 쳐 줘야 한다는 것을. 


지루하고 재미없는 고랑을 이는 작업이 내 삶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표지 그림 : Henri Matisse, 1917, <Portrait de famille (The Music Lesson)>, oil on canvas


*로베르트 슈만, 위키피디아 검색




https://youtu.be/n_jCFLWeMto?si=yXNk5iMKkYno-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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