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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21. 2023

쇼팽은 샤넬이다

피아노에게 배우는 마음가짐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에게 쇼팽은 유난히 특별하다.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기도 벅찬 수많은 작곡가들 중에 왜 쇼팽인가. 단지 난이도 때문에 특별하다고 하기엔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작곡가들도 어디 칠 테면 쳐 봐라 하는 '오선지에 잉크 좀 뿌린' 곡들을 많이 써냈다.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의 곡이 부드러운 청록색을 띤 공작새의 깃털이라면 쇼팽의 곡은 푸른 보랏빛이 도는 벨벳 같은 우아함이 있다. 그가 오랜 기간 앓았던 결핵과 결국 그 병 때문에 아프게 헤어진 연인들과의 이별 이야기가 악보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일까. 쇼팽은 170cm의 키에 45kg 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바스러질 것 같은 몸과 야리야리한 영혼이 지어내는 멜로디는 유리같이 섬세하고 투명할 수밖에 없다.


 병약하고 위태로운 쇼팽은 여성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고 한다. 쇼팽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인 마리아 보진스키와 이별 후 유럽을 매료시킨 남장여자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씩씩한 상드는 어머니처럼 쇼팽을 돌보고 쇼팽은 아들처럼 상드를 따르게 된다.


 쇼팽은 피아노 곡만 20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그중 왈츠가 21곡이다.  내가 친 왈츠곡은 21곡 중 가장 쉽다는 세 곡이다. 마주르카에 가까운 특징이 있는 Valse No. 10 Op. 69-2와 Valse NO.7 Op.64-2, 그리고 Valse No.6 Op.64-1이다.   


 Valse는 프랑스어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왈츠를 뜻한다. 유퀴즈 <이종열 조율사> 편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음향감독이 '이별의 왈츠'(쇼팽이 마리아와 프랑스에서 헤어질 때 작곡한 곡)를 짧게 연주하는데, 악보를 본 유재석과 조세호가 '발새'라고 읽어서 큰 웃음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쇼팽의 왈츠 중 69-1(왈츠 No.9)과 69-2(왈츠 No.10)는 1835년 쇼팽이 마리아 보진스키와 헤어지면서 그 슬픔을 곡으로 표현한 것이다. 쇼팽 사후 발견된 악보들 중에서 이 두 곡에 '마리아'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고 하는데, 69-1은 마리아가 직접 '고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https://youtu.be/IOXZJ-BlHl0?si=TVvzMtn-lpJVXF7F



 Valse No.7 Op.64-2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 전학생과 피아노 왕자 위하오의 피아노 배틀 신에 편곡되어 나오며 유명세를 탔다. 쇼팽은 대중적이고 가벼운 빈 왈츠에 실망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녹여 새로운 왈츠를 작곡했다고 하는데 이 곡은 폴란드적 정열과 감수성이 짙다는 평을 받는다.


https://youtu.be/Tlmw4RDZ1co?si=lad6JS3L9qQ8FvqC



 Valse No.6 Op.64-1은 일명 '강아지 왈츠'라고 불리는데 조르주 상드의 별장에서 쇼팽이 기거할 당시 상드의 강아지가 꼬리를 열렬하게 흔드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한다. 몰토 비바체로 1분 40초 내외의 아주 빠르고 짧은 곡이다. 이 곡을 배웠을 때 내 강아지는 기운이 많이 없었던 거 같다. 나는 간신히 모데라토 정도로 칠 수 있었다.


https://youtu.be/kU1uWKmG55M?si=LQo3AbwcVNAkJIk5



 쇼팽이 작곡한 녹턴은 총 21곡으로 왈츠의 곡 수와 같다. 나는 이 중 딱 한 곡을 쳤는데,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국민 녹턴 9-2이다. 몇 년 전 깜냥도 안 되는데 피아노 선생님의 강요에 의해 우격다짐으로 치게 되었다. 영화 샤인에서 배우 '제프리 러쉬'가 수개월 연습을 해서 '왕벌의 비행'을 직접 연주했다고 하니, 내가 녹턴 9-2를 친 게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은 아닌 듯하다. 다만 '치느냐, 연주하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며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사랑과 조국을 되찾는 이루지 못한 꿈들을 그의 곡에 녹여내며 황홀감을 고조시켰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피아니스트들은 쇼팽을 피아노의 절대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쇼팽은 명불허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가기 위해 최근 1년 반 정도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쳐 왔다. 5곡 연속으로 치다 보니 모차르트 곡은 의욕이 생기기보다 시큰둥해졌다. 그런 나를 보더니 선생님께서 회심의 카드를 꺼내신다.


"우리 쇼팽 하나 할까요?"


 선생님은 책장에서 악보책을 한 권 스윽 뽑아 드시더니 한 페이지를 보여주신다.


"흑건은 에튀드 중에서 난이도가 제일 낮은 편이라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속도는 신경 쓰지 마시고 치는 것에 의미를 두고 해 보는 게 어때요?"


 모차르트의 생기 발랄함에 지쳐 시들해진 기분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쇼팽?!


 집에 돌아와서 조성진의 에튀드 연주를 틀어놓고 쇼팽의 에튀드 책 꺼내들었다. 멜로디를 따라 책을 뒤적거리며 '이건 다시 태어나면, 이건 세 번쯤 다시 태어났을 때......' 이렇게 속으로 '다음 생애 칠 곡 리스트'를 가르다가 문득 이런 비슷한 경험을 했던 생각이 났다.


2020년 5월 한국의 한 뉴스 사이트에서 ["샤넬 백 지금 사면 100만 원 싸다"… 백화점 '오픈런' 대란]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개인 소장용도 있지만 가격이 오르기 전에 구매를 했다가 샤테크를 한다고 하니, 도대체 가방은 얼마며 무엇을 파는지 궁금해져 샤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흔하게 많이 본 디자인도 보였고 내 눈에 예뻐 보이는 디자인도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격에 흠칫 놀라며, '이건 로또 되면', '이건 숨겨진 유산이 나타나면'..... 이런 식으로 하나씩 걸러나갔다. 그러다가 과연 샤넬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건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이트를 샅샅이 뒤지고 찾아낸 그것은 바로 카드 지갑이었다.


 샤넬 홈페이지에서 ‘그나마’ 손이 갈 만한 것을 뒤적거리던 나는 쇼팽의 수많은 곡들을 뒤적여 '그나마' 쉬운 곡을 찾고 있었다. 내가 곡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곡이 나를 선택하고, 내가 물건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물건이 나를 선택하는 건가? 누군가의 글에서 '내가 품위가 없냐, 샤넬이 없지'라는 말을 읽었다.


'내가 피아노가 없냐, 쇼팽을 못 치지.‘


 비록 내가 치고 싶은 곡은 소화를 못하더라도 만족의 마지노선이 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쇼팽의 에튀드 책을 만지작 거리며 느끼는 작지만 큰 만족이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이나가키 에미코'가 쓴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에서 그녀는 피아노가 주는 기쁨은 노후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레슨이라고 말한다. 나도 피아노 안에 우리의 인생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이가 들어 피아노를 치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음'의
온갖 버전을 체험하는 일이다.

-이나가키 에미코


 

 피아노는 지금 나의 뜻대로 칠 수 없는 곡에 대해 (내 뜻대로 구입할 수 없는 사치품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기보다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지금-여기,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어떤 곡을 치고 어떤 가방을 메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내 앞에 일어나는 일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오늘도 피아노를 통해 배운다. 샤넬 가방을 구매한 사람들의 후기에서 보면 가방이 '영롱하다'라는 표현을 한다. 나에게 쇼팽은 샤넬이다. 언젠가 녹턴을 한 곡 더 영롱하게 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현재'를 쳐 보겠다.






표지그림 : 무도회에서 연주하는 쇼팽. 테오필 크비아코브스 그림, ‘쇼팽의 폴로네이드’의 일부. 포즈난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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