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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Sep 13. 2023

간신히 참고 있어

성장의 소음

    

 피아노라는 취미에는 다양한 장점이 있다. 내가 느끼는 피아노의 장점 중 가장 으뜸은 몰입이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빠져들 때처럼. 너무너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주위가 까매지고 그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와 비슷하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을 시작하면 아무 생각 없이 악보와 건반과 내 시신경, 뇌신경, 손가락의 소근육과 팔과 어깨의 대 근육, 온몸의 세포들이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피아노라는 취미의 최대 단점은 무엇일까. 바로 소음이다. 피아노뿐 아니라 바이올린, 플루트, 트럼펫, 드럼 등등 모든 소리를 내는 악기는 소음이 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된다.      


어떤 유럽의 피아니스트가 집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에 다양한 소감의 댓글이 달렸다. “이 피아니스트 옆 집에 살고 싶어요”, “옆 집에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매일 콘서트 직관일 듯”과 같은 아름다운 연주를 탐하는 댓글들이었다.


그중 아주 현실적인 댓글이 하나 눈에 띄었다. 자기가 사는 윗집에 유명한 소프라노가 살았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소프라노에게 ‘천상의 목소리’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는 댓글에 적었다. “그 소프라노 가수가 이사를 간 뒤에 진정한 천국을 맛보았다”라고.   

   

내가 요즘 배우는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번이다. 지독히도 손가락이 안 돌아가는 구간이 있어서 이 부분을 집중공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구간 반복은 치는 본인은 극복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소음이 괴롭지 않다. 그저 건반을 정확히 누르는 일에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업라이트 피아노에서 치다가 아무래도 민원이 들어갈 거 같아서 디지털 피아노로 자리를 옮겼다. 

  

여름에 헤드셋을 쓰면 귀에 땀이 찬다. 그래서 디지털 피아노에서 소리를 작게 해 놓고 친다. 얼마나 쳤을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파에 누워서 책을 보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 너 진짜 참을성 좋다. 어떻게 그렇게 참고 있을 수 있어?     


아들이 답했다.      


“간신히 참고 있어.”     


웃음이 터졌고, 미안해진 나는 그날 연습을 접었다.      


예전에 봤던 김민식 작가의 세바시 강연을 다시 찾아보았다. 제목은 <외로움을 설렘으로 바꾸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고령화 시대에 외로움을 헤쳐 나가는 주제의 강연이었다.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나 자신이 건강한 것이고 노인치매의 주적은 ‘외로움’이라고 한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법을 세 가지 소개하는데 그중 하나가 악기연주였다.   

   

김민식 작가는 잠시 백수로 지낼 때 집에서 노는 피아노를 보고 동병상련의 감정이 일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민폐의 소음이 신경 쓰여서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했다. 그가 피아노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하나하나 다 공감이 되었다.      


정신 건강에 진짜 좋다.

잡념 삭제에 최고다.

집중, 몰입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내가 가장 공감한 부분은 듣는 사람들은 괴롭지만 정작 치는 나는 안 괴롭다는 작가의 말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이 틀리는데 나는 느낀다.
 
어제보다 오늘 잘 친다는 걸.
오늘 연습을 하면
내일 나는 잘 칠 거다.


       하루하루 성장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성장한다는 얘기가 나오니 첼리스트 카잘스 생각이 난다.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통해 매일 더 나아짐을 느낀다는 유명한 이야기.


22년 반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임윤찬 군이 1등을 하면서 괴물 신예 피아니스트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윤찬 군의 인터뷰를 보니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다'고 한다. 그저 연주가 좋을 뿐인가 보다. 동상이몽이다. 나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 시간씩 연습하고 싶다. 수백 번 구간반복을 해도 누구의 눈치도 안 보는 곳에서 피아노를 치고 싶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반드시 그 정도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탁월하지 않아도 즐길 수는 있다.            

     

김민식 작가가 한 말을 가슴에 새기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다시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아야겠다.   



아름다운 세상은
못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세상이다.






표지그림 : 2021년 Imagine Van Gogh Vancouver 에서 직접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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