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之; 즐기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수영을 28살에 처음 시작했는데 물속에서의 자유를 느끼게 되면서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수영장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마음 급하게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졌다. 마치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보았을 때, 나의 발자국으로 수놓고 싶은 충동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F45라는 인터벌 트레이닝을 말레이시아에서 처음 접했을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극강의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통쾌한 전율 때문이다. 에너지가 많은 편인 나는 어떻게든 이 에너지를 발산해야 했는데 인터벌 트레이닝이 제격이었다.
캐나다로 이사를 결정하고 제일 먼저 구글에 검색한 것이 F45였다. 내가 살 곳 근처에 F45의 존재 유무와 거리를 확인했고, 캐나다에 정착하고 가장 먼저 등록한 것도 F45였다.
펜데믹으로 문을 닫았다가 다시 오픈을 했을 때 내 체력은 이미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알기에 다시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작년 12월부터 다시 F45를 시작하여 지금은 주 4회 정도 출석을 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내 삶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애착이 가는 운동이다.
유산소 운동을 하는 날의 그 불타오르는 희열을 느낄 때 ‘F45 너무 좋아!!’를 속으로 외친다.
또 하나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것이 있다. 바로 피아노이다. 치는 것도, 피아노 연주를 듣는 것도, 피아노라는 물체 자체도 사랑한다.
어린 시절에는 피아노가 싫다고 빨간색 체르니 책에 피아노 선생님 이름을 빨간 색연필로 적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저학년 때의 일이다. 두고두고 후회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선생님이 방문하신 날, 나는 내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귀를 틀어막고 쪼그려 앉았다. 방문을 열라고 한참을 문을 두들기고 설득을 하시던 엄마와 선생님의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렇게 피아노는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
굳게 잠긴 문이 다시 열리는 데에 무려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고 8년이 지났다.
8년 동안 친 것 치고는 참 실력이 늘지를 않는다. 내가 왜 어릴 때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문을 닫았는지, 어린 내가 성찰력이 좋았구나 싶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매력과 재미가 있다. 악보를 읽고 떠듬떠듬 칠 때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처음이니까 괜찮아’라는 초심자의 특권을 매번 새로운 곡을 만날 때마다 누릴 수 있다.
곡이 익숙해지면서 내가 들었던 그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할 때,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다. ‘내가 이 곡을 치다니.....’ 하는 자기 만족감에 도취된다.
연습을 시작하면 마치 주당이 ‘한 잔만 더!!!’를 외치듯이 한 번만 더 쳐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후 디지털 피아노의 볼륨을 작게 해 놓고 연습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곗바늘이 9시를 가리킨다.
아쉽다. 더 치고 싶다.
잠자리에 들면 연습했던 부분의 악보와 멜로디가 머릿속에 가득 찬다. 그리고 다음날이 소풍인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품는다. “빨리 내일이 되어서 또 피아노 연습하고 싶다.”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좋아하는 것이 있음이 삶에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즐길 수 있다는 것, 무언가를 찬양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공자가 말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여기에서 즐긴다는 것은 즉각적인 쾌락을 주는 음주, 섹스, 도박 같은 행위들이 아니다. 논어의 구절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에 반영시키는 사람들이 ‘고수’이듯이 시간을 들여 즐거움을 얻을 때 비로소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 즐길 줄 아는 당신이 챔피언이라는 싸이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이제는 순간의 쾌락보다 공들여 얻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내 인생의 챔피언에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다.
표지그림 : Childe Frederick Hassam, <The Sonata>,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