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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Dec 30. 2023

욕, 할까 말까

과거 욕쟁이의 고백


※주의 : 본 글은 약간의 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욕에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부끄러운 욕의 기억

말레이시아에 살 때의 기억이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방앗간처럼 들르던 빵집이 있었다. 슈퍼의 한편에 붙은 소박한 빵집이다. 여느 때처럼 크루아상과 아이스라테를 시키고 자리를 잡았다. 빵을 한 입 무는데 뒤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야, ㅅㅂ, 뭐 먹을 거냐?      


조폭이라도 들어왔나 싶어서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의 젊은 남자들과 여자 하나였다. 그들은 빵을 훑어보며 무얼 먹을지 탐색했다. 욕과 함께.      


-ㅁㅊ, 이 빵 ㅈㄴ 맛있어 보인다.(긴 생머리의 여성이 한 말)      


방언처럼 연이어 터지는 빵에 대한 찬사인지 욕인지를 연신 내뱉던 젊은이들은 빵을 포장해서 유유히 빵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냐하면 나는 10대를 거쳐 20대 내내, 무지막지한 욕쟁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저렇게 보였겠구나 싶어서 뺨이 뜨거워졌다.      


고통과 욕의 상관관계

한국어 강사가 되고 나서부터 욕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습관은 튀어나왔다. 30대에 진입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욕은 많이 잠잠해졌다.      


그렇다고 내면에서까지 욕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몇 개월 전에 친구와 카톡을 하면서 심한 욕은 아니지만 저속한 말을 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팔이 아파서 재활 운동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온 적도 있다.      


욕을 하면 고통이 감소한다는 연구가 있다. 2010년 이그노벨 평화상 수상의 주제가 <욕은 우리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였다. 연구자는 부인이 아이를 출산할 때 세상 험한 욕을 다 내뱉는 것을 보고 의사와 간호사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때 의료진은 다 그런 거라고 하며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는 것에서 착안을 했다.      


연구자는 '욕을 하면 고통이 줄어드는가?' 하는 호기심에서 실험을 했다. 두 그룹으로 사람들을 나누고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게 했다. 한 그룹은 참는 동안 욕을 하게 했고 한 그룹은 욕을 못하게 했다. 더 오래 참은 그룹은 욕을 한 그룹이었다.       


고통을 느낄 때 욕을 하면 더 잘 참게 된다는 결론이다. 연구 결과도 있으니 내가 팔이 아파서 미치고 팔짝 뛸 때 했던 욕은 좀 봐주기로 하자. 아이가 들은 것도 아니니까.     


욕밍아웃

우리 부모님은 욕을 하지 않으셨다. (마음이 상하는 비난의 말은 많이 했지만-이것도 욕이나 마찬가지의 상처) 나의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이년/저년’이라고 부르신 적이 없다. 중고등학교 내내 주변에서 자기 딸을 그렇게 부르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대학교에 갔을 때 엄마가 자기를 그렇게 부른다는 한 친구의 말을 듣고 문화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엄마는 신기하게도 내가 학교만 다녀오면 그렇게 새로운 욕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렇다고 깡패는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10대에 욕을 했던 이유는 ‘재미’였다. 내가 욕을 하면 주변 친구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개그우먼 중에 욕을 찰지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느낌이었지 싶다. 나에게 욕은 웃음의 코드였다. 그렇게 찰지게 내 혓바닥에 욕이 스며들었다. 20대에는 동생이 나에게 ‘팔도 욕 대회’에 나가보라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나 정도의 욕 수준으로 입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욕받이

최근에 PT를 받았다. PT를 받으면서 참 욕을 많이 들었다. 당연히 트레이너가 나한테 한 욕은 아니었다. 처음 그녀의 욕을 듣게 된 것은 하마스의 극악무도한 행태에 대한 비난이었다. 그때는 시원하게 배설하는 그녀의 욕에 간접적으로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그런데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인간관계의 전반적인 호칭이 ‘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역적인 특색일 수도 있겠다. (그곳에서는 전혀 욕이 아닐 수 있는) 친구들과의 호칭도 이년, 저년, 남사친은 이 새끼, 저 새끼 심지어는 남편한테도 거침없이 욕을 하며 부른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쌍시옷까지 곁들인 호칭으로 불렀다고 했다.      


그녀의 수다 내내 이어지는 타인에 대한 욕 세례가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듣기가 거북하고 웃기지가 않았다.   


치명적인 욕

욕이 일상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있다. 접두어 또는 접미사처럼, 그리고 추임새처럼 욕을 한다. 욕은 아주 경제적인 언어다. 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어휘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다양한 감정의 표현을 단 하나의 단어로 함축해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욕의 가장 큰 문제는 충동성 조절을 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욕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두 번 세 번 곱씹어 생각하고 욕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성장기에 자주 욕을 접하면 뇌에 상처가 생긴다고 한다. 이 상처는 뇌에 큰 흉터를 남기고 전두엽에 손상을 준다. 욕을 많이 들으면 스트레스 물질이 분비되고 대뇌에 상처를 낸다. 흉터가 생긴 뇌는 장벽이 두꺼워지고 인지기능의 저하, 충동성의 증가를 초래한다.      


충동성이 높아지면 술이나 약물에 빠질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역시.....) 미국의 노숙자 대상 조사에서 100% 공통점으로 어린 시절 욕을 많이 듣고 자랐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뇌는 남과 나를 구분하지 못한다

욕의 긍정적인 점을 꼽으라면 고통의 감소와 카타르시스 정도이다. 욕도 반복해서 하면 고통 감소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한다. 욕을 듣는 대상이 없으니까 혼자 하는 욕은 괜찮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욕을 하면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남’이 아닌 바로 ‘나’이다.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욕은 속으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욕쟁이 할머니가 될 거라고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이다. 지금도 욕은 안 하지만 2024년에는 속으로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내 뇌의 욕 굳은살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겠다.   





             


표지그림 : 이중섭, <닭과 게>


참고자료

<부모의 분노 언어, 아이 뇌에 흉터 남는다>, SBS뉴스 2023년 12월 24일

<진짜로 욕을 하면 고통이 줄어들까?> 10년간 욕에 대해 연구한 욕 전문가의 연구 [이그노벨상 읽어드립니다 EP.03] 김경일 교수 & 김태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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