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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an 12. 2024

당당하게 책을 읽지 않는

그녀의 이름은 실리

 

실리



나는 그녀를 실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영어의 어리석다는 silly 가 아니라 실제로 이익을 얻는다는 뜻의 실리實利이다. 그녀는 실제로 효과가 있는 것만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실용주의 철학파이다. 하지만 그녀는 철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녀가 추구하는 삶의 철학이 실용주의에 가깝다는 말이다.      


1866년 고종 3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한 병인박해가 계기가 되었다. 로즈 제독은 전함 7대를 끌고 와 강화도를 점령했다. 당시에 로즈 제독은 조선인의 집이 허름하고 사람들이 남루한 것에 한 번 놀라고, 집집마다 책이 있는 것에 두 번 놀랐다고 한다.   

   

나는 책이 집의 벽을 둘러싸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는 환경에서 자랐다. 아, 그 사이에 온갖 양주병이 2열 횡대로 줄지어 서 있었다. 어릴 때 명절의 기억은 이렇다. 세 식구가 큰집에 가지 않고 한 집에 조촐하게 모인다. 어른들은 1차로 술을 드셨고 인터벌 타임에는 책을 읽으셨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비’, ‘서생’ 집안이었다.      

  

부모님의 신조는 ‘공부하고 저축하는 놈 못 이긴다’였다. 덕분에 우리 집은 돈 놓고 돈 먹기, 재테크, 주식 투자, 부동산, 사업 같은 경제 분야의 정보는 어린이집과 비슷한 수준이다. 손해를 보지 않는 최고의 수단은 ‘돈 안 쓰기’ 뿐이었다.           


나는 요즘 책을, 아니, 책만 많이 읽는 것에 대해 아주 커다란 물음표를 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50세도 되기 전에 수 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과연 삶의 현장에서 현명하고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을 못하겠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책과는 거의 담을 쌓았다. 하지만 책을 수 천 권 읽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보다 지혜로운 삶, 마음이 평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영글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책이 과연 그들에게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 나는 독서의 참된 의미에 대한 총체적 회의감이 들었다.  

    

책을 읽어내기만 하는 것은 책을 지은 이가 깨달은 지식을 스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소적인 지식을 읽고 학습한 단어들을 씨실 날실로 엮어서 말이나 글로 풀어내는 것은 일견 그럴듯하다.   

   

책을 많이 읽어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고, 읽지 않는 사람을 교양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책을 많이 읽고도 자기 아이에게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 한 권 안 읽어도 아들 엉덩이에 손찌검 한 번 안 하고 키우는 사람도 있다. 


책을 수 천 권을 읽어가면서 각종 철학자와 선인들의 말은 이해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손자병법을 읽으며 삶의 전술을 깨달은 사람이 정작 가족들의 화목은 지키지 못한다면 독서는 안구 운동에 불과한 것인가?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책을 읽지 않는 실리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검색한다. 어차피 써야 하는 돈이라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실리를 만날 때면 나는 책 밖의 ‘진짜 세상’을 만나는 것 같다. 그녀는 나를 융이니 프로이트니 하는 복잡한 정신세계에서 끄집어내어 실손 보험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녀가 보험 설계사는 아니다)     


실리는 앞으로 암에 걸렸을 때 어떤 치료를, 얼마나 보장을 받을 수 있는지 약관을 살펴보고 여러 곳에 상담을 받으면서 견적을 낸다. 이 작업을 지치지도 않고 이어간 끝에 드디어 그녀에게 최적의 보험 상품을 설계하게 되었다. 돈에 있어서 '적당히'는 없다. 그녀는 자기 삶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녀를 만나면, 캐나다에서 난방비와 가스비 절약하는 방법, 타이어 최저가, 아이들 옷 텍스 안 내는 방법, 팁 적게 주는 법, 환불 받기 등등 실생활에 필요한 그야말로 꿀팁들을 전수 받을 수 있다. 그녀는 책을 후벼 파는 대신 절약 정보를 들이 판다. 


어떤 사람은 이속에 밝다. 어떤 사람은 지식이 방대하다. 누군가는 실용적인 기술을 찬양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간의 존엄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책을 읽지만 성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성인의 책을 읽지만 유아적인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책은 분명히 마음의 양식이다. 사고의 확장과 언어의 확장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책에 코를 들이박고 매몰되어 제대로 호흡하지 못한다면 독서는 그저 남의 말 읽기에 그칠 뿐이다. 한마디로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무지성이다.      


내가 육아 서적을 아무리 읽어도 육아가 힘들 때 육아 선배인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힘들어 죽겠다, 왜 책에 쓰여있는 대로 하는데 나아지는 게 없냐.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육아는 책으로 하는 게 아니야.      


그때는 책을 읽지 않는 친구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코웃음 쳤던 나를 반성한다. 친구가 옳았다. 진짜 삶은 책으로 사는 게 아니라 실천이다. 삶은 실전이다. 




  


표지그림 : <Writer in the Snow Puzzle> by Ilya Mil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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