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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an 24. 2024

상황 대처 카드가 부족한 호모 엄근진쿠스

        

어제 알고리즘의 부름으로 ‘금쪽 상담소’를 보게 되었다. 배우 신소율 씨가 출연했는데 [상대가 주는 자극에 쉽게 상처받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부재가 달렸다. '나야 나.' 하며 눈을 크게 뜨고 화면에 몰입했다. 


신소율 씨는 사람들이 출산계획을 묻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상대가 가볍게 건넨 말임을 알면서도 그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 게 너무 힘들었고, 그 말에 제대로 답을 못한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삭이다가 심지어는 이명이 오기까지 했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신소율 씨의 고민을 다 들은 오은영 박사는 ‘융통성’의 부족에 대해 언급을 했다. 유연성과 융통성은 상황과 맥락 등 다양한 사안을 고려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밥 먹었어요?” 또는 “어디 가세요?”라는 질문이 “안녕하세요?” 의 다른 말이다. 결혼을 한 새댁에게 아이 소식을 묻는 것은 화용적으로 안부 묻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박사의 말이다.

(댓글에는 '아니요, 진짜 왜 애 안 갖냐고 간섭하는 거예요.'라는 말도 있긴 하다.)

      

헤어질 때 “나중에 밥 한 번 먹자.” 는 말은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말 대신 사용되기도 한다. 신소율 씨는 이런 말을 들으면 진짜 ‘밥을 먹자’는 말로 이해하고 연락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내가 겪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2010년 최초 개발되어 널리 전파되고 현재 대한민국 국민 92.3%가 사용하는 카카오톡. 지금은 사람들이 헤어질 때 “카톡 할게~”가 ‘잘 가’라는 말처럼 쓰이고 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나는 카톡을 늦게 시작한 편이다. 스마트 폰을 2015년에 가졌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에서 2년을 한국 사람을 모르고 살았다. 그러다가 같은 콘도에 사는 한국인 가족과 친해지고 나서야 “카톡 할게~”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함께 놀고 헤어질 때 그녀는 말했다.   

  

“언니 카톡 할게요.”     


나는 그녀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녀의 카톡을 기다렸다. 계속 기다렸다. 카톡 한다면서 왜 안 하냐고 묻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어느 날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왜 위층에 사는 이모는 전화한다고 하면서 전화를 안 하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함께 놀고 헤어질 때 나의 아들에게 “이모가 전화할게~”라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잘 가'라고 했을 뿐이고 아들은 진짜 전화할 거라고 생각했다. 위층 이모는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 사는 많은 외국인들이 '문자 할게', '전화할게'라는 한국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많이 헷갈려한단다. 아니, 외국인은 그렇다고 치고 나는 한국 사람인데 왜 이 말을 인사로 받아들이지를 못했을까?       


신소율 씨가 나와 결이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자 오박사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하~~ 사는 게 엄청 힘들겠다     


마치 내가 신소율 씨로 빙의가 된 기분이었다. 오 박사는 이어서 말했다.      


이분은 지나치게 정직한 사람이에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네, 맞아요.”  


나는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곧이곧대로 정직하게 대답을 하는 편이다. 정직한 건 좋은 거지만 이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나는 종종 가벼운 질문에 기자회견 하듯이 대답할 때가 있다. 그리고 돌아서서 고민에 빠진다. “왜 이렇게 나한테 질문을 많이 하는 거지?” 


왜긴, 자세하게 대답을 해주니까 그 안에서 계속 질문이 생성되는 거지.      


통용어로 받아들여야 할 것까지 진지하게 대답을 하고 그 질문의 의중을 따지면 정말 살기가 팍팍해진다. 통용어에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본인이 너무 힘들어진다. 지나치게 정직한 탓에 통용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신소율 씨와 나의 공통점이다.      


오 박사가 지적한 또 하나, 부드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빈약하다. 당황스러운 상황에도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양해져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유머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문제 대처 방식이 몇 개 안 된다는 오 박사의 지적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나의 원가족은 가풍이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다. 유머도 좋아하고 웃을 때는 웃지만 기본 마인드 세팅은 엄근진이다. 심리적 스트레스 상황이나 내면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숙한 방어기제인 유머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ㄱ'은 'ㄱ'이지 'ㅋ'이 될 수 없다.     

 

어제 영상을 보고 나서 싸늘한 기억의 파편 하나가 뇌리를 관통했다. 


며칠 전에 젊은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는 나에게 ‘칭찬해’라는 말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칭찬하다'는 동사이다. 일단 '칭찬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게다가 칭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칭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거야~’라고 내 딴에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검색을 해 보니 ‘아는 형님’이라는 예능에서 개그맨 강호동 씨가 ‘아주~ 칭찬해’라는 말을 해서 유행이 되었다고 나온다. 아뿔싸..... 유행어인지도 모르고 호모 엄근진쿠스의 자세로 대처한 나를 쫓아가서 말려주고 싶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조금 더 유연하게, 융통성 있게, 유머로 승화시키기



        


표지그림 : Frederick Leighton - <Solitude>,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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