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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an 21. 2024

독이 되는 긍정

친구에게 시련이 닥쳤다. 애인이나 배우자의 외도일 수도 있고, 주식 폭락일 수도 있다. 예상치 못하게 친구가 병의 급습을 받았을 수도 있고, 병의 습격 대상이 배우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나 큰 시련이다.      


한 사람의 감정이 살얼음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어라 말을 해 줘야 하나 고민한다. 내가 알고 있는 좋은 말을 총동원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말은 ‘시간이 약이다’ 일 것이다. '액땜했다고 생각하라'는 말도 부적처럼 자주 등장한다.      


오래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A, B 그리고 나, 세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수업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임신 6개월에 접어들어 이제 제법 임산부 티가 나고 있었다. A 선생님은 지난달에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같은 산모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덧은 안 하냐고 A의 안부를 물었다. 순간 A의 표정에 망설임의 구름이 드리워졌다.      


이윽고 입을 연 그녀는 ‘계류 유산’이 되었다고 전했다. 공간에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먼저 말을 꺼낸 나는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거 같았다. 뇌 하드디스크에서 적절한 단어 색인을 풀가동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던 B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차라리 잘 됐지 뭐!      


유산이 잘 됐다는 뜻은 아니고, 주 수가 더 차기 전에 일찌감치 유산이 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A의 얼굴을 보았다.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B를 쳐다보며 “잘 됐다고 할 수는 없죠~!!”라고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B는 '유산'이 당사자에게 어떤 아픔을 가져왔는지 이해하려고 했을까? 아마 아픔을 알기에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얼른 털어버리길 바랐을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는 말은 일견 긍정적으로 들린다. 바로 이런 말이 ‘독이 되는 긍정’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는 우리 삶에 건강한 에너지를 부여한다. 독이 되는 긍정은 우리의 감정을 부정하고 강제로 억누르려고 한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은 때로는 큰 상처에 붙이는 작은 반창고와 같다. 상처를 제대로 어루만지지 않고 당장 급한 대로 진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힘들어하지 마, 붙잡고 있지 말고 잊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가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관계의 언어>에서 말한다. 


상대의 주관적 경험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것에 동참하고 공유하는 것이 마음 헤아리기이다. 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바꾸려고 한다.      


긍정도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또 자신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 잊지 못하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회복에 걸리는 시간은 모두 다르다.


괜찮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어 “괜찮다”라고 거짓말을 하게 된다. 괜찮다는 거짓말은 감정의 억압이 된다. ‘억압’은 미성숙한 방어기제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마음 다친 사람을 상대할 때, 그들의 감정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사탕발림으로 밑도 끝도 없이 좋아질 거라고 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약이야.”, “뭘 그렇게 까지 생각해.”, “괜찮아질 거야.”라는 툭 치면 나오는 말들 대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상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면 된다. 속상하다고 하면 속상하구나, 우울하다고 하면 우울하구나 하고 읽어주면 된다. 그리고 나아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내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 하고 물어본다.      


이도 저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해도 된다. 나에게 힘든 짐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내가 그 일에 대한 답을 줘야 할 의무나 책무는 없다.      

     

내가 오래전 A선생님에게 했어야 하는 말이 이제야 떠오른다.      


“저런...... 선생님 몸은 괜찮아요?”          






표지그림 : Consolation

Hildegarde Handsaeme•Belgium

Original artwork, 50×70 cm, 2018


*Whitney Goodman <Toxic Positivity : Keeping It Real in a World Obsessed with Being Happy>, 이 책은 아직 한국에 번역 출간되지 않은 듯합니다. Whitney Goodman은 미국의 심리 상담사입니다. 독이 되는 긍정 Toxic Positivity에 더 관심이 있으신 분은 그녀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itwithwhit/?hl=en을 방문해 보세요.


*100번 째 글입니다. 짝짝짝!!! 앞으로 열 번만 더 100개의 글을 쓰면 제 목표인 '천 개의 글'이 완성되네요. 그날까지 열심히 뚝딱뚝딱 글을 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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