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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Feb 21. 2024

제 감정 보신 분?

소화되지 않은 감정 2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 이거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거 맞지?     



이런 질문을 친구들에게 참 많이 했다.      


상식 밖의 황당한 일을 겪은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꼭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 맞는지 물어봤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처럼 남편에게 쪼르르 달려가 상황을 일러바쳤다. 걔가 어쨌고, 쟤가 어쨌고 했는데 나 기분 나쁜 게 이상한 거야? 하며 내 감정感情에 대해 감정勘定을 받았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기분 나쁜 게 맞다고 하면 본격적으로 기분 나빠했고, 아니라고 하면 마음 구석에 넣어뒀다가 반추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씹고 또 씹었다. 소화는 되지 않고 너덜너덜해지는 건 내 마음뿐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나의 감정을 주변사람들에게 묻는 것이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친구들은 그런 질문을 나에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쾌한 일이 있어서 누군가를 씹고 싶으면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서 열받았다고 하지 “나 이렇게 느끼는 게 맞아?”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는 왜 나의 감정을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물품 감정하듯 감정을 받으려고 할까?’ 하는 질문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초등학교 국민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가족들이 나만 집에 두고 외출한 일요일이었다.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마침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들장미 소녀 캔디’를 보고 있었다.      


이 만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캔디’는 눈물 콧물 쏙 빼는 초강력 최루탄 순정만화이다. 이불을 끌어안고 엉엉 울고 있는데 현관에서 철컹철컹 열쇠 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나는 이불로 눈물을 박박 닦으며 안 운 척을 하려고 노력했다. 연기력이 좋았는지 부모님이 모르는 척하신 건지 상황은 조용히 넘어갔다.      


그리고 그때의 장면은 내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우냐’고 하며 울면 안 되는 건 캔디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런 과거의 일화를 보았을 때, 감정의 억압이 상당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다 보면 스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어린 시절 억압이 과하면 자녀가 성장해 알코올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씀이다.     

 

지금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잘 모르니 그저 술로 억누를 수밖에 없고 이런 생활양식은 고착되어 중독자가 된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캔디를 보고 우는 감정을 수용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가 감정의 수용을 받지 못하면 감정 전선에 혼란이 생긴다. 나는 슬퍼서 울었는데 울지 말라고 부모님이 화를 낸다면? 아이는 슬픈 감정은 나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다음번에 슬픈 감정이 들면 억누르려고 한다. 억누르고 부정하고 외면해도 감정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가 감정을 부정당하는 일이 잦아지면 성인이 되어 화낼 일이 아닌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폭발을 한다.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질문 하나, 말 한마디에 일상생활에 타격을 받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어린 시절 수용받은 경험이 거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어릴 때, 투정, 불만, 짜증 등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수용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타인에게 들은 말과 불쾌한 상황에 대한 반추를 하는 것도 해소되지 못한 자신의 감정처리 때문이다. 그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되새김질을 하게 된다.      


인간관계를 잘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수용의 경험이 없다면 지금 내가 나를 수용해 줄 수 있다. 마음 챙김, 알아차림의 도움을 받으며 나의 감정을 헤아려주면 된다. 어렵고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이다.      


운동도 하기 힘들지만 끝내고 나면 개운한 기분이 들듯이, 하나하나 나의 감정을 찾아갈 때 마음 근력도 튼튼해지고 비로소 내 감정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내 감정의 주인이 되면 마음에 앙금을 남기지 않으니 타인을 회피할 필요도 없고,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비난할 일도 없다. 건강한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보장될 것이다.      




표지그림 : https://www.talkspace.com/blog/coronavirus-emotional-contagion-man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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