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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pr 05. 2024

매정과 다정사이

우리는 모두 성인입니다. 



효녀네.


요즘 세상에도 그런 말이 있나?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이와 둘이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그 이야기를 친구와 카톡으로 나누었다. 친구는 내가 부모님도 모시고 함께 갔다고 오해를 하고는 나에게 '효녀네'라고 했다. 


자기는 보통의 한국사람과 달리 서구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늘 주장하던 친구였다.  그런 '서구적인' 친구에게서 '효녀'라는 말을 들으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가슴 한켠, 큰 방에 고국에 계시는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산다. 나의 동생은 미국 이민 15년이 넘었다. 동생은 미국의 초청이민 제도를 이용해 부모님을 모시려고 했다. 


아빠는 솔깃해하셨으나 엄마는 싫다고 하셨다. 익숙한 한국, 병원이 편한 한국을 떠나기 싫은 것도 있지만 다 큰 아들과 지척에서 부딪히며 살고 싶지 않아 하셨다. 


얼마 전 밴쿠버 지역 카페에 고민 글이 올라왔다. 한국에 계신 80대가 되신 부모님을 위해 캐나다 생활을 잠시라도 접고 귀국을 해야 할까 하는 글이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부모님을 뵈러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한두 달 한국에서 보내고 헤어질 때 눈물의 이별을 하고 온다는 사람도 있었다. 자녀들이 어리다면 잠시라도 귀국해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된다는 댓글도 있었다. 


그렇게 한두 해 보내면 정말 마음이 편해질까? 참고로 나의 친할아버지는 95세, 증조할머니는 100세까지 사셨다. 잠시가 10년이 되는 수가 있다. 


가장 인상에 남는 댓글은 [나이가 들면 자식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겠다]는 댓글이었다. 이건 자식의 의견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도 예전에 그랬다.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거 같았고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엄마 없는 세상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거 같았다. 9살 어린이일 때가 아니고 29살 때도 그랬고 39살 때도 그랬다. 


임신했을 때는 밤에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운 적도 있다. 남편은 몹시 황당해하며 자기 어머니는 부산에 계시는데 장모님은 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지 않냐고 당장 내일 만나라고 했다. 



나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얼마나 부모님과 유착이 심한지를 알게 되었다.(특히 엄마) 몸은 따로 떨어져 살고 있어도 나의 정신은 9살 소녀 그대로 부모님과 함께였다. 


한국은 유달리 '효'를 강조하는 나라이다. 강조하다 못해 강요한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키워주신 것은 부모님의 선택이었다. 


부모님이 나를 키우기 위해 돈을 쓰신 것은 미래에 대비하는 '투자'를 하신 게 아니고 당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신 것이다. 자식을 키우는 건 의무이지만 효도는 옵션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의 사랑은 갚아야 하는 '채무상환'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매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께 다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부모님은 또 다른 인격체의 성인이다. 물론 더 연로해지시고 스스로 활동이 힘들어지신다면 도와드릴 수 있다. 


하지만 '희생하는 효녀'가 되어 나를 갈아 넣는 효행을 할 생각은 없다. 성인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엄마는 내가 10대 때부터 부모와 자식도 '남'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도 동생도 한국에 살지 않으니 부모님이 외로우시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우리가 한국에 살면 부모님은 외롭지 않으실까? 결혼을 한 부부도 외로움을 느낀다. 


인간은 모두 외로운 존재다. 


어른은 자신의 외로움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아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아들이 독립하고 결혼하면 보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그저 살기를 바랄 뿐이다. 


상담을 받고 나서 부모님과 정서적 독립을 진행하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장소는 쇼핑몰에 있는 레고샵이었다. 

엄마와 둘이 샘플 레고를 갖고 놀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손에 든 블록을 툭 내려놓으시더니 "나 네 아빠한테 갈래." 하며 레고샵을 박차고 나가셨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엄마를 쫓아나갔다. 레고샵 문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찾으니 엄마는 벌써 저만치 멀어지셨다. 


그때 나는 옆을 보았고 다른 장난감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엄마를 쫓아가지 않고 새로운 장난감 가게에 가서 새로운 장난감 박스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펴보았다. 



한국 어른들의 부모님과의 정서적 독립을 응원합니다. 





표지그림 : 앙리 루소, <독립기념 축제>, 1892



* 혜윰님, 블로그의 글 잘 읽었습니다. 

   단주 1,000일 많이 많이 축하드려요. 오래오래 함께 단주하는 단주 동지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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