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편해지자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는 사람, 늘 먼저 나가서 가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 한 번 한 약속은 지구가 두쪽이 나도 지켜야 하는 사람, 적개적이고 경쟁적이며 성취지향적인 사람, 수시로 분노하는 사람
이런 유형의 사람을 A형 사람이라고 부른다.
A유형 성격의 사람은 늘 초조하고 조급하며,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다. 타인의 단점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편이다.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 한꺼번에 여러 일을,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려고 한다. *
나의 아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인생 첫 기관에 데뷔했다.
우리는 생일파티에도 많이 초대받았고 베이비 샤워나 결혼식, 송별회 같은 파티에도 참석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남들과 다르게, 그리고 지나치게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떤 모임에서든 1등으로 도착하는 건 나와 아들이었고, 심지어는 모임을 주최하는 사람보다 일찍 도착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늦기 위해 노력했으나 희한하게도 도착하면 정각이었다. 가끔 10~20분 정도 늦으면 목표를 달성한 기쁨을 느끼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를 보면서 그냥 A형도 아닌 AAA(트리플 A) 형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빠 사전에 지각을 하거나 약속을 어기는 것은 대재앙이었다. 아빠와의 약속에 늦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대역죄인이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의 일이다. 아빠를 픽업해서 어딘가를 가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쑤셨다. 체온계를 꺼내 열을 재보니 40도였다. 도저히 운전을 해서 이동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만큼 아파서 오늘은 아빠 혼자 가셔야겠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아빠의 화 깊은 빡침가 느껴졌다. 아빠는 까칠하게 “알았어!”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뚝 끊어버리셨다.
나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친부 여부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 역시 그의 딸이 아니던가. 유전자의 반을 물려받았고, 기질도 물려받았고, 함께 산 세월 동안 무시무시하게 강화되었다.
아들의 친구와 플레이 데이트 약속을 잡았는데 아들이 아프면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약속을 깨야했기 때문이다.
깊게 각인된 장면이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친구와 약속을 한 날 아침에 아이의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나는 사우디 엄마에게 거의 빌다시피 상황을 설명하며 못 만나겠다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사우디 엄마의 반응이 내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아이가 우선이라고, 잘 케어해 주라고 한 것이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아, 아파서 약속을 지킬 수 없어도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내 어깨는 언제나 경직되어 있다. 마사지숍의 테라피스트도, 필라테스 선생님도 내 어깨를 만지면 깜짝 놀란다. 너무 단단하게 뭉쳐있다는 것이다.
A유형의 인간은 다음날의 일을 전날부터 시간별로 계획을 한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서 준비한다. 계획한 일은 반드시, 차질 없이 완수 해야 하기 때문에 늘 긴장상태에 놓여있다.
계획이 어긋나면 말 그대로 멘붕에 빠지고 평정심을 잃는다.
굳어진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트리플 A까지는 말고 -A형 정도의 인간으로 나 자신을 완화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조금 더 편안해지고 싶다.
표지그림: 일리야 밀스타인, <오후 휴식>
*https://blog.naver.com/healingzon11/22259423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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