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기술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너무 많이 왔구나!’ 하는 자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궁금해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것이다.
인간관계를 깊이 있게 만드는 것은 적당히 속을 터놓는 이야기이다. 자기를 지나치게 감추는 것도 가까워지기 힘들고 자신에 대해 말 그대로 TMI를 하는 사람은 부담스럽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자기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담보다는 주변인 이야기, 사회의 돌아가는 이슈, 가십거리만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허탈함과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마치 ‘보이는 라디오’의 공개방송에 관객으로 참가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자기의 이야기만 하는 게 좋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안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자기의 아픈 과거를 낱낱이, 소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다소 당황스럽다.
나를 오픈하는 것도 순서와 단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반대로 중간 단계를 뛰어넘고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짜고짜 그의 나체를 본 느낌이다.
대화를 나누다가 신이 나면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내 이야기를 술술 할 때가 있다.
우리의 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보다 자기가 말할 때 더 즐거워진다. 경청이 어려운 이유이다.
얼마 전에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친구와 과거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누게 되었다.
그 친구와 나눈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을 때, 어떤 사람은 ‘판단’을 했고 어떤 사람은 ‘조언’을 했다. 때로는 판단, 조언, 충고가 세트로 나오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건 널 사랑해서 그런 거지, 나처럼 해봐, 안 그럼 너 나중에 후회한다.‘ 이런 식이다.
섣불리 판단하고 조언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기가 싫어진다. 특히 내 이야기를 하기가 싫다. 차라리 어제 본 ‘꼬꼬무’ 이야기나, 요즘 최대의 가십 거리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내가 만났던 공허한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를 오픈하는 것의 단점 같은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그 두 사람이 모두 아주 사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경청의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드러내어 애꿎은 조언 같은 걸 듣지 않아도 되는 대화법은 ‘사회적 기술’ 중 하나이다.
모든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다. 투명하게 내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함께 고뇌하고 연민하는 대화만이 좋은 대화는 아니다.
진지한 대화는 그 대화가 통하는 몇 사람과만 나누면 충분하다. 그 외에는 선을 지키며 아주 가벼운 이야기로 즐거운 관계를 이어나가면 된다.
표지그림 : Leah Gardner, <High Key Honeyd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