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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08. 2023

현실 도피는 방임의 굴레로

대체 성숙한 육아는 언제 할 생각이십니까

 아동 학대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물리적인 폭력을 떠올린다. 최근 몇 년 동안 뉴스에서 자주 접하게 된 아동 학대 소식은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된다. 손이나 도구를 사용한 신체에 가하는 폭력 뿐만 아니라 아이를 째려보는 눈빛, 한숨 등도 학대에 해당한다. 이러한 부모의 태도는 아이에게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정서적 학대못지 않게 무심코 던진 언어 폭력의 학대를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다. 


 아이가 스쿠터를 타다가 실수로 다른 아이를 칠 뻔 하자 "미친거 아냐?"라는 말을 서슬퍼렇게 내뱉는 엄마, 정작 물어봐야 하는 말을 선생님께 안 물어보았다고 "으이그~ 이 바보야~" 라는 말을 여과없이 아이에게 투척하는 엄마. 


 상처를 주는 구체적인 말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도 학대에 해당된다. 이 부분에서는 나도 할 말이 없다. 그저 많이 반성하고 있다. 


 내가 엄마가 되어 가장 많이 자행한 학대는 고성보다도 아마 '방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술을 마시는 동안 아이를 혼자 만화를 보게 하고, 숙취에 시달리는 동안 아이를 혼자 장난감을 갖고 놀게한 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연신 "엄마 놀자~" 라고 말하는 아이를 옆에 두고 숙취에 시달리는 엄마라는 인간은 "엄마 너무 졸려서 그런데 조금만 잘게" 라는 말을 남기고 까무룩 잠이 든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내 육체가 회복을 하는 동안 아이의 영혼은 상처를 입는다. 


 물론 아이도 혼자 노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나 엄마가 함께 놀아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언제나 그렇듯 정도의 문제이다. 현명하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자기 도피처로 삼은 술 뒤로 엄마가 사라져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후자였다. 


 어느 여름 방학, 아이와 호주 한 달 살기를 해보려고 짐을 꾸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선택한 장소는 브리즈번이었다. 브리즈번은 프랑스인 친구 샬럿이 2년간 어학연수를 한 곳이었다. 


 그녀는 내게 호주에 가면 꼭 마셔야 하는 '맥주'리스트를 건내주었다. 샬럿은 프랑스 와인 부심이 대단해서 호주 와인은 '두통 유발'음료일 뿐이라고 손사레를 쳤다. 하지만 호주 맥주 하나만큼은 진짜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니 그 맛이 더욱 궁금해졌다. 


 브리즈번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다 된 늦은 밤이었다. 이미 비행기에서 와인을 여러 잔 마시기도 했고 리쿼 스토어는 문을 닫았을 시간이니 잠을 청했다. 차라리 늦은 밤에 도착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안그랬으면 숙소 주변의 리쿼스토어부터 찾아갔을 것이다. 


 다음날 부터 한 달간 나의 호주 맥주 먹부림은 필사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맥주가 그렇게 맛있는 음료인지 호주에서 처음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주 기록을 남기는 나이지만 정상 음주인이고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호주에 가면 다양한 맥주를 탐방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을 정도이다. 


 식당에 가면 색도 맛도 다른 드래프트 수제 맥주들의 탭이 나란히 서서 끝없이 맥주를 뿜어낸다. 호주산 앵거스 비프로 만든 햄버거를 먹을 때는 드래프트 비어를 마시고 숙소에서는 캔맥과 병맥을 번갈아가며 마셨다. 나는 브리즈번에서도 매일 리쿼 스토어에 가서 또 일개미처럼 맥주를 사다가 날랐다. 


 우리가 간 시기는 호주의 겨울이라 해가 일찍 졌고 가게들은 또 어찌나 일찍 문을 닫는지. 어둑해질 무렵 숙소에 돌아오면 긴긴 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술 마시는 거 외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잠시 머물다 갈 계획이니 장난감도 갖고 간 피규어 몇 개와 핫 휠 몇 대가 전부였다. 아이와 나는 호주산 쇠고기를 구워 먹고 나면 각자의 아이패드를 붙잡고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말할 것도 없이 내 손에는 맥주가 쥐어져 있었다. 그런 밤을 한달 간 보냈다. 아이의 기억 속에 브리즈번은 'PJ MASK' 만화의 본고장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에게 만화를 보는 건 큰 즐거움이다. 나에게도 빨간머리 앤, , 날아라 거북선, 태양소년 에스테반 등 제목도 주제가도 기억나는 만화들이 많이 있다. 


 적어도 나의 엄마는 나를 만화와 대면하게 하고 술을 대면하시지는 않았다. 나의 정서발달을 만화한테 일임하고 술을 마시고, 온종일 갖고 놀아도 다 못 갖고 놀 만큼의 장난감 더미에 아이를 파묻고 잠을 청하지는 않으셨다. 


 방임도 학대라는 사실을 조금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깨끗하게 씻기고 좋은 옷을 번듯하게 입힐 지언정 나는 아이의 정서를 방임했다. 그리고 크게 뚫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그 작업은 술을 끊기 위해 더욱 더 처절한 몸부림을 치면서 이루어졌다. 


 엄마라는 현실에서의 회피, 직면해야 하는 아이를 돌보는 스트레스, 아이에 대한 몰이해와 같은 것들이 나를 미성숙한 육아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술은 일시적인 탈출구였고 해방감을 주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통쾌한 해방감은 오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무거운 두통을 끌어안은 채 감쪽같이 같은 자리에 있는 나를 보았다. 


 블랙홀 같은 방임과 음주의 굴레 속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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