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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13. 2023

눈물로 비워내기

과거를 애도하는 작업


 많이 울었다. 단주를 개시한 첫 달은 늘 눈이 물에 잠긴 북어처럼 퉁퉁 불어있었다. 그간 해 왔던 수십만 번의 잘못된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아이가 학교를 간 사이 혼자 밥을 먹다가 울었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갑자기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 술과 작별을 해야 한다는 슬픔 때문인 건지, 중독이 된 나에 대한 연민인 건지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지지는 않았다. 그 둘이 고기와 기름을 분리할 수 없는 마블링이 잘 된 소고기처럼 뒤섞여 있었다.


 술을 마실 당시에 유튜브로 '세바시'를 즐겨봤다. 당장 나를 바꾸지는 못해도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술을 끊겠다고 결심을 해서인 건지 마침 눈에 들어온 강연이 있었다.


  키슬이라는 닉네임으로 단주를 전도하는 한 여성의 영상이었다. 제목은 <의도적인 상상으로 '살고 싶은 '삶을 경험하라> , 키워드는 '음주, 중독, 치유, 마음, 알코올 중독'이었다. 전형적인 고도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인 그녀의 이야기는 내가 겪은 술로 범벅된 삶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영상을 다 보고 난 식탁 위에는 내 눈물과 콧물을 닦은 휴지더미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나를 눈물 나게 하는 일은 다양했다. '나는 알콜중독자다' 카페에서는 한 회원님이 나를 위해 서영은의 노래 '혼자가 아닌 나'를 올려주시며 응원을 해주셨고 그걸 보면서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훔쳤다.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비록 온라인이지만 자조모임이 있잖아. 


 또 나를 울게 한 다른 유튜브 채널은 한 유명한 미용사의 채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본 것은 미용실에서 근무하는 두 팀이 고깃집에서 회식을 하는 영상이었다.


 살면서 늘 강하게 주장하던 식탁 위에서의 철학이 있었다. 그건 '고기를 먹을 때 술을 안 마시면 죽는다'였다.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일주일에 최소 삼일은 삼겹살에 소주가 저녁 메뉴였다. 내 카카오 스토리 일기장을 돌려보면 고기 옆에는 항상 샴쌍둥이처럼 술이 붙어있다.


 내가 본 영상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두 명의 젊은 팀장과 각 팀의 어시스턴트들까지 합쳐 모두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고깃집 불판에 둘러앉아 있다. 화기애애하게 고기를 굽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고, 서로 놀리고, 젊음의 기운을 대 방출하며 왁자지껄 떠든다.


그런데...... 테이블에 술이 없다.


그들은 젊은데, 회사 회식인데, 고기가 앞에 있는데...... 술 없이 텐션 좋게, 즐겁게, 맛있게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내 눈에서는 눈물이 대 방출되었다.


이렇게 살 수 있구나. 고기 먹을 때 술 안 마셔도 안 죽는구나......

 

 고기를 다 먹고 일어선 그들이 향한 곳은 내가 늘 2차로 가는 류의 맥주집이 아니라 볼링장이었다. 여전히 술은 없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너무 즐겁다.


2차에서 술을 안 마실 수도 있구나......


 내게는 그 영상이 완벽하게 이국異國의 이異문화체험과도 같았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주변인들은 대체로 다 술을 좋아한다. 그렇게 모이게 되어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너무 진부해서 이제 쓰고 싶지도 않다. 


 가끔 술을 안 마시는 직장 동료들이 커피숍만 3차를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유니콘 신화라도 들은 듯 신기해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하고는 상극이었다. 정서나 감정이든, 어떤 장르의 취향이든, 신체의 활동 영역이든 도저히 작은 부분도 교집합을 찾기가 힘들었다. 술 안 마시는 사람은 무조건 노잼이라는 편견을 마음속에 닻처럼 내리고 있었다. 


 내게는 술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알코올 사용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은 하면서도 중독이라고 '인정'은 하지 않았다. 술래잡기하듯이 계속 도망쳐 다니기만 했고 술은 술래처럼 집요하게 "넌 중독이 맞다"며 내 뒤를 쫓아왔다.


 나는 술을 열렬하게 추종하던 나를 떠나보내야 했다. 내 삶의 큰 지분을 차지하던 술을 끊는 것은 일종의 '상실'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죽음과 애도에 관한 5단계 모델을 보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5단계를 거쳐 변화를 경험한다고 한다.


부인 혹은 부정 : 상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 슬픔이 몰아쳐오는 속도를 더디게 해 줌.
분노 : 상실에 대한 치유 단계의 필수. 강한 좌절감을 분노로 표출.
타협 혹은 협상 : 상실에 있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
절망 : 절망은 꼭 지나쳐야 하는 단계. 우울함을 받아들여함.
수용 : 상실을 인지하고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단계. 

 

 위의 다섯 가지 애도의 단계는 반드시 순서대로 겪거나 다섯 가지를 모두 겪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때로는 생략되기도 한다. 상실의 최고 미덕은 '성장을 위한 기회'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21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초입에 나는 술을 마시던 나를 애도했다.  부인하고 부정하는 단계를 넘어섰고 지나간 과거의 선택에 대한 분노와, 슬프고 우울한 절망을 경험하는 단계를 지나고 있었다.





표지 그림- John Everett Millais(존 에버렛 밀레이), '오필리아'(1852), 런던 테이트 브리튼 소장 


 햄릿의 연인이었던 오필리아.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하는 아버지, 선택과 결정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었다. 연인 햄릿에게 아버지를 잃고 미쳐가던 오필리아는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녀는 자신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상황에 노래를 부르며 익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그녀의 모습은 술을 끊지 못하면 내가 걸어가야 할 비참한 인생의 결말을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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