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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Jul 15. 2023

피클은 오이가 될 수 없다

안 마시는 나로 살기

 22년 8월 4일 아침이 밝았다. 나는 눈을 뜨고 내 마음속에 계속 품고 있던 커다란 백기를 높이 들어 흔들며 투항했다.



나는 술 앞에 무력하였음을 시인합니다.





 A.A. 의 경험서인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12단계의 회복 프로그램 중 1단계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단계: 우리는 알코올에 무력했으며, 우리의 삶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시인했다.


 한국이었다면 A.A. 에 참여했을 듯 하지만 해외에 살고 있는 나의 선택은 다시 '나는 알콜중독자다' 카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저 좀 살려주세요', '제가 왜 이럴까요?', '끊고 싶어요'와 같은 처절한 문장은 없었다.

'다시 왔어요'가 제목이자 내용이었다. 담담했다. 1년 전에 이미 다 울었고 괴로웠고 슬펐다. 나는 초연해졌다. 응원 댓글을 달아주시는 익숙한 닉네임에 잠시 울컥해졌을 뿐이다. 나는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2020년에 첫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공부를 시작한 나는 '즉문즉설'을 즐겨봤다. 그러고 보니 유튜브를 참 많이 보는 것이 중독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누구나 다 이 정도는 보잖아요?라는 말은 꽤 익숙한데..... 누구나 다 이 정도는 마시잖아요?


 다시 법륜 스님으로 돌아와서. 스님이 하신 많은 말씀 중에서 정말 내 가슴에 와서 박힌 것이 있다.


뜨거운 컵을 손에 쥐고 뜨겁다고, 어떡하냐고 발을 동동 구른다고 달라지나요?
그럼 이 뜨거운 컵을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탁 놓으면 돼요.



스님의 말씀 그대로 나는 술을 탁 놓았다.



 단주를 시작한 날 아직 몸은 술에 절어있었다. 중독계에서는 유명한 비유가 있다.



오이는 피클이 될 수 있지만 피클은 오이가 될 수 없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의지가 약하거나 게으른 사람들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술을 마실 의지가 강하고 부지런히 술을 마셔서 중독이 되었다는 얘기까지 할 정도로 중독자 중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알코올 중독은 알코올이라는 중독물질에 의해 뇌에 생긴 질환이다. 마약과 같은 원리이다. 단지 마약은 술보다 몇 백배 강력하게 작용할 뿐이다. 단 한 번의 투약으로 뇌의 구조가 완전히 변한다고 한다.


 한 실험에서 정상인과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1초에 한 장씩 사진이 지나가는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산이나 바다 등의 자극적이지 않은 풍경 사진들이었는데 중간중간 술 사진을 섞어 넣었다.


 정상인들은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술 사진에 뇌의 보상계가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알코올 중독자들은 1초 지나가는 찰나의 사진에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그 활성화가 일어나지 않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술을 끊고 5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고 하니 치유의 과정은 지루하고 답답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중독자 본인은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술 사진이나 다른 사람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 뇌의 보상계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응을 한다고 한 의학전문 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술을 끊는 것이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이유이다.

 


 정신과에서는 중독 환자들이 오면 썩 반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독 질환을 '회전문 질환'이라고 부르는데 병원에서 치유가 된 듯하여 내보내면 문을 열고 나갔다가 빙글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라고 신영철 교수는 말한다. 그만큼 치유와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저 살얼음판을 걷듯, 날달걀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아가야 한다.



 8월 4일 오후 아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바닷가를 찾아갔다. 저녁 시간의 외출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 술을 마시고 지냈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여름 날씨는 세상의 청명함을 다 품은 듯 경쾌하고 맑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줄을 선 가게에 우리도 동참했다. 커다랗게 올라간 빙산 같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씩 나눠 먹으며 석양을 보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이렇게 저녁 시간에 나와서 일몰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저녁밥을 술 없이 즐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물론 바닷가 레스토랑 파티오 자리에는 술잔이 놓인 테이블도 많았다)


 나는 뜨겁게 내려가는 태양을 보며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제 내 인생에 술이 발 붙이게 하지 않겠다. 술 뒤로 숨지 않겠다.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내 시간과 영혼을 건 부당한 거래를 하지 않겠다.



 


그리고 오늘로 단주를 시작한 지 1년을 20일 앞둔 345일이 되었다.  


 






http://www.khmnews.co.kr/news/article.html?no=1210



https://cafe.naver.com/alcohholic



http://www.aakorea.org/aaintro.html



표지 그림

에드바르드 뭉크의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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