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다. 봄보다는 가을이 더 좋다. 겨울은 무조건 싫다. 이렇게 겨울이 싫은 내가 겨울왕국이라고 하는 캐나다에 살고 있으니 인생은 아이러니다.
그래도 밴쿠버라고 하는 곳은 북쪽 프린스 조지나 몬트리올, 동부 사스콰추안 처럼 혹독하게 추운 겨울은 아니라 살만하다.
한때 꿈이 동남아의 에메랄드 빛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이라고 글에 쓴 적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는 수만 킬로 떨어져 있으니 꿈을 반만 이룬 셈이다.
적도가 가까운 말레이시아에도 나름의 겨울이 있다. 내가 머물기 시작한 첫 해 겨울이 이상저온 현상으로 유독 추웠다. 그 이상 저온이라는 것이 17도~19도 정도였으니 영하 20도 가까이 내려가는 곳에서는 코웃음을 칠 온도이기는 하다.
하지만 밤에 17도까지 내려가면 꽤 쌀쌀하다. 나도 밤에 추워서 급하게 긴팔 옷을 구했을 정도였으니 산간지역이나 시골의 허술한 나무집은 추위에 무방비였다. 실제로 그해에 저체온증으로 꽤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씨를 나는 '리조트 데이'라고 불렀었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열대의 나무 그늘 아래에 놓인 비치베드, 일렁이는 수영장의 물결, 그리고 피자와 감자칩.
한때 수영을 너무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고 괌이나 사이판 같은 곳에 놀러 가면 물 만난 물개처럼 물에서 나올 줄 모르고 즐겼다. 새카맣게 타서 나중에 껍데기가 홀랑 벗겨져도 그게 나에게는 여름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외국인이 거주하는 형태의 콘도(아파트)에는 대부분 수영장이 있다. 내가 살던 콘도는 정원과 수영장이 어지간한 고급 리조트 찜 쪄먹는 수준이었다. 집에서 아이스커피나 화이트 와인에 얼음을 잔뜩 넣어 텀블러에 담고 수영장에서 놀면 굳이 돈 내고 리조트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여 당연한 것이 되면 재미가 떨어진다. 말레이시아에서 좀 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수영장에서 열심히 노는 한국 사람들은 새로 온 사람들'이라고.
수영장이 딸린 집에서 사는 것도 몇 년이 되면 그 풍경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수영장에 발을 끊게 된다.
///
밴쿠버로 이사를 오고 첫 해 여름 최고 기온이 38도에 육박했다. 단 며칠간의 이벤트성 무더위였지만 충격은 상당했다. 포터블 에어컨은 입고가 되는 즉시 품절이 되어버렸다.
여태껏 그런 더위가 밴쿠버를 습격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구글에 밴쿠버 기후를 검색하면 여름은 짧고 쾌적하며 가장 더운 7월에도 23도를 넘지 않고 드물게 26도를 기록한다고 나오는데 이번 주말에도 32도까지 올라갈 전망이라고 하니 '드물게 26도'라는 말은 이제 빼야 할 것 같다.
에어컨이 필요 없던 밴쿠버였기에 대부분의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짓는 신축 콘도에는 시스템 에어컨이 들어가기 시작한 정도이다. 한국처럼 거실형 스탠드 에어컨을 쉽게 구하고 설치할 수 있는 환경 또한 아니다.
나도 로또에 당첨되듯 운 좋게 포터블 에어컨을 한 대 구했고 그 덕분에 다음 해 여름에는 개처럼 헐떡이지 않고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캐나다 사람들은 여름이 오면 카약을 들고 호수로 강으로 떠난다. 캠핑을 하거나 피크닉을 즐기며 자연 속에서 여름을 보낸다.
작년 여름은 오롯이 집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어딘가를 가지 않은 내 인생 최초의 여름이었다. 지루할 것만 같았던 시간이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오늘은 29도이고 햇볕은 따갑다. 요즘 골프니 산책이니 하며 밖에 나돌아 다닌 시간이 많았던 탓에 벌써 팔이 시커멓게 타 버렸다. 손에서 어깨까지 짙은 갈색에서 원래의 내 피부색으로 그러데이션 된 팔을 보니 이번 여름 민소매 옷은 못 입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일요일, 아들과 피자를 먹고 집에 돌아와 나의 음악 리스트를 틀어놓고 무슨 책을 읽을지 검색하는 이 행복에 겨운 시간이 지금 나의 여름이다.
행복은 기분이 아닌 상태라고 한다. 좋아하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이중주로 아이스 메이커가 윙윙 소리를 내며 얼음을 만들며 내는 소음, 소란스럽지 않은 나의 마음 상태, 고요한 지금 나의 이 상태가 행복이다.
https://youtu.be/O8kH3hOdBVk?si=EZxo7DvAy3yaAlXu
표지그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