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Aug 12. 2024

더 깊어지기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2020년 여름, 불혹이 넘은 나이에 진짜 성장통이 찾아왔다. 


10세를 목전에 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보다 더 심각하게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육아는 막막했고 나의 마음은 막연했다. 


코로나 기간에 진행된 무료 원데이 부모코칭 수업에 참여한 것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심리 상담이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 고착되어 온 비난과 비판의 껍질로 둘러싸인 비좁은 알의 공간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알을 깨고 나와야 했다.


심리상담을 받는 동안과 받은 후에도 심리학, 영성심리학, (깊이는 부족하지만) 서양철학 7: 동양철학 3, (철학보다 더 얄팍한) 불교 등을 공부하면서 나 자신의 내면의 성장을 도모했다. 


변해가는 모습이 서글프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퇴행이 아닌 성장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하는 방향이다. 


이제 겨우 약 4년 간의 내면성장 여정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내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불안과 방어기제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형 성과주의 비교의 피해자 아빠, 바다와 같이 넓은 이해심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자존감, 단순히 허세를 잘 부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의 불안.


위와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자 내 마음의 첫 반응은 거북함이었다. '왜 저래?'라는 비난의 거북함이라기보다는 고요한 호수에 큰 돌덩이를 던지는 것 같은 묵직한 울림이었다. 


내가 변하면서 느낀 가장 충격적인 것은 엄마가 그렇게 비난하던 아빠와 '초록은 동색'이었다는 것이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비판과 비난, 그리고 넘겨짚는 판단의 말들은 나에게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왔다. 



엄마는 종교도 없는 무신론자이고 운명 같은 것을 믿지는 않지만 재미 삼아 해마다 신년 운세를 보러 가신다.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을 찾아가기도 하고 사주풀이를 하는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 곳의 무속인이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상이 강하다





간단히 말하면 '아상이 강하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고 엄격하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상태이다. 


공부를 하면서 나는 엄마의 자존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인정사정없이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을 무시하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사람들을 무시했는지" 엄마한테 묻고 싶었다. 


굳이 엄마에게 묻지 않아도 내가 구독하는 '맨디쌤'의 매거진에 전문가의 말로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


남을 무시하는 버릇은 자신이 의식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쉽게 컨트롤되지 않습니다.
......
이 사고방식은 사실 자신에게 더 악영향을 끼칠 때가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 남을 무시하는 버릇이 자주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또한 자주 무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합니다.


/


나는 엄마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사람으로, 쭈글쭈글하고 추한 늙은이로, 쓸모없는 노인으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엄마의 마음에 들 수가 없었던 것은 엄마 스스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에게 '자존감'을 운운한다거나 비난을 거두고 감사한 마음으로 사시라고 훈계질을 할 수는 없다. 나는 엄마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마주했을 때,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다. 


나 역시 종교는 없지만 문득, 이래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학생 때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하고 놀다가 '신은 없다'는 나의 발언에 친구들은 손을 맞잡으며 "주여, 이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했다. 


동정sympathy이 아닌 긍휼compassion이다. 나의 상담 선생님께서도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은 'compassion 긍휼'이라고 하셨다.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아마도 엄마는 나를 여러 번 놀래키는 말씀을 하시겠지.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할 테다. 


엄마가 스스로에게 관대한 마음과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으시길, 그리고 내가 엄마를 긍휼히 여길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드릴 수 있는 사랑이다. 






표지그림 : 베르나르 뷔페, 잔 다르크 - 목소리(1957)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