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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Aug 17. 2024

침묵이 편한 공간

말을 아껴야 할 때를 안다는 것


한국에서는 운전을 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곳은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다. 간혹 맛집이나 유명한 카페 중에 차가 없으면 접근이 어려운 경우가 있지만 그럴 때는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딱 한 번 택시를 타 봤다. 내 차가 견인되었을 때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그랩'이라는 택시 어플이 있어서 운전하기 질렸을 때나 친구들과 '한 잔' 약속이 있을 때 주로 이용했다. 


말레이시아에서 택시를 타면 나의 외모가 '이방인'의 그것이기에 관심을 보인다. 왜 말레이시아에서 사는지, 어떻게 살게 되었는지, 자기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있다 또는 한국에 갈 예정이다 등등 다양한 질문 공세를 받게 된다. 


기억에 남는 택시 기사가 여럿 있지만 그중 한 명만 언급해 보자면, 외국인인 나를 붙잡고 자기 나라 '정치'얘기를 쏟아내던 사람이다. 주 내용은 당시 총리였던 부패의 대명사 '나집'에 대한 비난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데도 열변을 토하던 그를 보면서 '오!! 어느 나라나 택시 아저씨는 손님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택시를 타면 기사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거 같다.


묵언 수행 중인 기사님과 투 머치 토커 기사님.


나는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나의 취향은 확고하게 '묵언 수행 중인 기사님'으로 굳어졌다. 


일본에서는 2017년, 한 택시 회사에 승객에게 말을 걸지 않는 '침묵 택시'가 도입되었다. 주로 지치거나 바쁠 때 택시를 이용하는데, 말을 걸지 않아서 좋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기사님으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는데 아쉽다는 의견도 있었다. 


택시 기사님 중에는 오래전부터 택시를 운행하신 분도 있지만 정년퇴직 후 제2의 직업으로 삼으시는 분들도 많다. 나의 경험상 정년퇴직 후 운전대를 잡으신 분들이 말씀이 많으신 편이었다. 


먼저 에필로그 식으로 화두를 던지고 난 뒤에 "제가 택시 하기 전에 000에서 일을 했었는데요"로 넘어간다. 

아무래도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신 분이니 하고 싶은 말도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장 최근에 탄 택시 기사님은 전형적인 '마초 아빠' 성격이었다.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력해진 배경에는 '다 해주는 엄마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사님 피셜에 의하면, 길 위에 차가 많아진 이유가 아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엄마 차'를 타고 이동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이동수단을 포함하여 아이들이 응당 스스로 해야 마땅한 일들을 엄마들이 발 벗고 나서서 대신해 주기 때문에 아이들의 자생력이 사라졌다는 주장에는 공감의 교집합점이 존재했다. 나 역시 인에이블러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에 호응을 좀 해 드렸다. 그러나 이 호응이 가져온 파급력은 대단했다. 


기사님은 아이들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건 '병신 만드는 일'이라고 열변을 토했고 자기 자신이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지에 대해서 침을 튀기며 말씀하셨다. 


'병신'이라는 말부터 듣기가 거북해지기 시작했던 나는 애써 창 밖을 보며 영혼 없는 리액션을 했다. 택시 탑승 초기의 내 맞장구가 이런 식의 급물살을 만들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다행히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는 시점이 되어 기사님의 말을 뚝 자르고 우회전을 해 달라고 했다. 그제야 화제는 '동네의 변화'로 옮겨갔고 곧이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가 무겁고 큰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사님은 최대한 출입구 가까운 곳에 세우려고 하셨고 천천히 꺼내라고 (급) 친절하게 마무리를 하셨다. 


그날 밤, 나는 영 마음이 불편했다. 아들에게 기사님이 말 할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으니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들었다'라고 해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나는 검색창을 열어 기사님들의 대화 시도를 가장한 일방적인 연설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다방면으로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택시 기사님에게 인생 훈계를 듣고 집에 가서 울었다는 젊은 여성의 글도 보았고, 받아치는 방법에 대한 유머 넘치는 글도 보았다. 




친구의 조언을 포함해서 '투 머치 토커 택시'의 가장 좋은 대처 방법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눈을 감아버리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결론이 났다. (내 성격 상 가장 어려워하는 처세술 중 하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으면서 침묵을 유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게다가 일대일로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나 역시 그런 경우에 침묵을 깨려고 억지로 화제를 뒤져서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종일 고독하게 운전대를 잡고 도로 구석구석을 누비는 택시 기사님들의 고충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다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는 잘 안다. 


그러나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며 택시를 몇 번 이용해 본 결과, 때로는 온전한 침묵의 순간이 더 편할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쩌면 택시 안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침묵을 지켜야 하는 때를 잘 아는 것은 적절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을 아는 때 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표지그림 : Joseph Ducreux, 1790, 

<The Silence> is a Baroque Oil on Canvas Painting created by Joseph Ducreux in c.1790. It lives at the National Museum, Stockholm in Swe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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