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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04. 2023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의 갑판에서

사유 거부란


W와 나는 오랜 친구이다. 그룹에서 100%의 여행 출석률을 자랑하는 멤버이다. 우리는 대학 1학년에 만나 지금까지 수많은 장소를 여행했으며 수많은 물건을 구입하도록 바람을 잡아줬다. 득템을 했을 때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는 사이였다. 


숱하게 많은 날을 함께하며 우리가 나눈 대화는 마치 바닷속 연체동물과 같은 모양이었다. 감칠맛 나게 짭짤했고 식감은 쫄깃했지만 뼈 없이 흐물거렸다. 우리 사이에서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23살 무렵. 20대의 중반으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친구 넷이 일본 배낭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에 올라탄 우리는 3등 칸에 짐을 놓고 잘 자리를 확보했다. 배는 늦은 밤에 출항한다. 출항 전에 석양을 보기로 하고 갑판으로 향했다. 우리는 넷이었지만 곧 둘둘로 나뉘었다. W와 나, 그리고 저 둘.  저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얼굴에 진지한 색을 한껏 칠하고 있었다. 대기의 기류가 그곳만 유난히 무겁게 내려앉았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
질색이야.

편하게 살자고.


무거운 공기의 저 둘과 다르게 우리말의 가벼움이 담배연기처럼 공기 중으로 퍼져서 아스라이 사라졌다. W와 나는 가장 원초적인 사람의 본능에 충실하며 살자고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의 갑판에서 도원결의와 같은 맹세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생각을 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상하게 생각을 피할수록 삶은 더욱더 꼬였다.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뿐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생각까지
안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끝없는 시험에 맞닥뜨리는 것과 같다. 시험의 형태는 다양하다. 객관식,  주관식, 논술이나 대학 기말고사 같은 서술형, 입시나 채용 면접 같은 구술형 시험들이 있다. 객관식은 찍기로 운에 맡길 수도 있다. 인생의 시험은 굳이 빗대자면 논술이나 구술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으면 답을 할 수 없는 형식의 시험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자기만의 생각을 글로 써 내려가야 한다. 


요즘 '생각을 하지 말라'라는 말이 세간에 도는 듯하다. 누가 추천해 준 영상을 보니 한 래퍼가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데 나의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사람은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은 불필요한 잡념을 버리라는 말이다.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때 '내가 이걸 왜 해야 하지?', '이거 말고 다른 거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내가 잘 못하면 웃기게 보이겠지?' 같은 후회나 중심을 흔드는 하나마나 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피겨 퀸 김연아 선수의 명언 중 유명한 말이 있다. 연습하는 김연아 님에게 기자가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생각을 하긴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둔하게,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사족을 달지 않는 삶이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유명한 말처럼 중심 생각은 확고하게 유지를 해야 한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경우에는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때가 있다. 생각해서 답을 내야 하는 순간 어렵다고 번번이 백기를 들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시모노세키로 가는 갑판에서 친구와 결의한 '복잡한 건 딱 질색이야, 편하게 살자고!'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정말 진지하게 임해야 하는 삶의 시험 앞에서 슬그머니 등을 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순간 직면을 거부하는 합리화였다. 



논어에는 아홉 가지를 생각하며 살라는 九思의 내용이 있다.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공자왈: 
"군자유구사: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생각하는 일이 아홉 가지 있다. 사물을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충실할 것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신중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 날 때는 물을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낸 뒤에 어렵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보게 되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한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듣고, 표정을 짓는지, 언행이 일치하는 일처리를 하는지,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는 않는지, 정의롭지 못한 이익은 과감히 거부하고 있는지, 감정적 분노를 잘 제어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존재방식이다. 나에 대한 성찰 없이 산다는 것은 그저 살아 있다는 것밖에는 의미가 없다. 


인간은 성찰을 하며 성장한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초월한 디오게네스적인 자족생활을 실천하기 위함인지 복잡한 문제를 회피하려는 전략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진석 철학자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생각 따위 하지 않는 대범한 사람인 양 행동하지만 마음은 온갖 걱정으로 떨고 있는 색려내임色厲內荏* 이 되지 않으려면 조금 어려운 문제에 맞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고 타당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무엇을 하든 생각하고 살아라! 






표지그림: CHARLES VICKERY (American 1913-1998) A PAINTING, "Ocean Dawn, " 20TH CENTURY


*[네이버 지식백과] 공자왈: "군자유구사: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논어의 문법적 이해, 2000. 1. 1., 류종목)


*색려내임色厲內荏 - 겉모습은 사납고 내면은 유약한 사람. 세상에 어떤 일이든 문제없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내면이 유약한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을 공자는 소인이라고 정의한다. 


*약 3주 전에 작성한 글입니다. 이유 없이 묵어가고 있길래 표면으로 끌. 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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