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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07. 2023

편지 쓰는 사람들

당신에게 그리고 나에게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90년대 말과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손 편지가 흔했다. 이미 채팅이 등장했고, 이메일도 있었지만 손 편지를 쓰는 일이 결심을 해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동네 문구사에 가면 우표와 편지지를 함께 구입할 수 있었다. 손 편지를 쓰고 우표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로 문구사로 가서 우표를 구입했다. 더불어 예쁜 편지지도 하나 추가한다. 편지에 우표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문구사 바로 앞에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그리고 열흘 정도 기다리면 다른 편지봉투에 다른 우표가 붙은 편지로 변해서 우리 집 우편함에 다소곳하게 누워있게 된다.     


나는 10대에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손 편지나 교환일기는 결혼을 하면서 다 정리했다. 그 많은 양을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편지를 다 열어보진 않았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고, 교환일기도 펼쳐진 페이지만 읽었다. 유치하고 감성이 가득한 10대 소녀의 말들이 종이에 진하게 스며들어있었다.  

    

20대 초반에 일본에 갔을 때 받았던 손 편지들이나 여행을 다니면서 모았던 엽서와 티켓들도 모두 눈에 흠뻑 적시고 정리를 했다. 그런데 정말 버릴 수 없었던 편지 뭉치가 있었다. 빨간색 체크무늬 틴 케이스에 들어있는 K군과 주고받은 편지였다.      


K군에게 처음 편지를 쓴 것은 그가 군대에 있을 때였다. 고등학교 선배 중 한 명의 부탁 덕분이다.      


 “여친도 없이 군대 간 외로운 놈 하나 있는데 편지 한 통만 써주라.”      


나는 이십 대 초반에 친구 오빠의 친구, 아는 오빠의 선임 등등 대략 5명 정도와 펜팔을 했었다. 어차피 쓰는 편지 한 통 더 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늘 쓰듯 평범한 인사와 스무 살 초입 여자아이의 깨발랄함이 가득한 편지를 마치 Chat GPT처럼 작성해서 K에게 보냈다.      


열흘쯤 지났을까? K에게 답장이 와서 열어본 나는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지금까지 주고받았던 군인들의 편지와는 결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른 군인들의 편지에는 휴가 나가면 한 번 보자,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자. 또는 부대에서 삽질한 이야기, 여름이면 죽은 매미를 빗자루로 쓴 이야기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K의 편지에는 그 흔한 삽질 얘기가 없었다. 음악 이야기, 영화와 소설 이야기, 자신의 감상 등이 마치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처럼 때로는 '사이프러스 나무'처럼 펼쳐져 있었다. 

 

K의 그림 같은 편지가 참 맛있었다. 나도 쓰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쓰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K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그는 제대를 했고 유학을 갔다. 유학을 가서는 편지의 횟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가끔 안부의 편지를 전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손 편지가 아닌 이메일로 전향했고 우리는 자신만의 이데아를 찾아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가장 최근에 마지막으로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내가 결혼하기 직전이다. 나는 이메일을 열고 그동안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결혼 소식을 전했다. 그는 답장을 통해 축하를 해줬고 행복을 기원해 주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인스턴트 메시지로 소통을 한다. 글은 짧아졌고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도 짧아졌다. 몇 시간 동안 카톡의 1이 사라지지 않으면 초조해진다. 예전에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손 편지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의 미학이 가끔 그리워진다. 나도 이제 '라떼' 찾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다.

      

기다렸다가 우편함을 열었을 때 만나는 손 편지, 조심조심 뜯어보는 편지 봉투, 그 안에 들어 있는 정성 가득한 내용.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이제는 이메일만 되어도 기쁘다는 걸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 온갖 광고가 들끓는 이메일 틈에 비집고 자리 잡은 한 통의 사적인 이메일을 만나면 도파민이 폭죽처럼 터진다. 


브런치에 올라온 여러 작가님들의 글에서 비슷한 문장을 보았다. 브런치 글이 ‘정성 들여 쓴 일기’라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조금 바꿔서 ‘정성 들여 쓴 편지’라고 하고 싶다.     

 

옛날 영화를 보면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우는 장면이 나온다. 바다를 부유하던 '편지가 든 병'은 누군가에게 발견이 된다.    

  

브런치나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도 비슷한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을 정해 놓기도 하지만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작가가 정성껏 쓴 글은 인터넷 위에 부유하고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열려서 읽히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야만 타인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을 보는 것은 아무런 단서 없이 암호를 해독하려는 시도와 같은 것이라고 홉스는 말한다.      


글을 쓰는 것은 내면의 정신활동이다. 브런치에 쓰는 글은 일기이자 곧 편지가 된다. 나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곧 내면의 정신활동이다. 이는 나의 내부를 풍요롭고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는 하나의 기술이다. 


오늘은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또는 가까이 지내면서 카톡으로 탄지彈指의 티키타카만 주고받았던 친구에게 이메일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표지그림 : Van Gogh, <Wheat field with cypress>,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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