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Oct 19. 2023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죽어줘야겠어(?)



  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
죽어줘야겠어

  



이런 농담, 가까운 친구들끼리 많이 하고 놀았다. 비슷한 느낌의 변형으로 “우리가 너무 오래 놀았나 보다, 그만 놀아야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상대방의 시시콜콜하고 잡다한 이슈까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가 되면 보통 정서적으로 더 친밀해짐을 느낀다. 함께 ‘공유’하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서서히 예열을 통해 조금씩 알아갈 때, 양파 껍질을 벗기듯 새로운 사실을 알아갈 때 우리는 관계 유지의 욕망을 느낀다.      


아주 드물지만 때로 이와 정 반대의 일을 경험하기도 한다. 요즘 하는 말로 ‘깜빡이 켜지 않고’ 들어오는 경우다. 몇 년 전에 동네에서 알게 된 엄마가 있었다. 우연히 친해졌고 전공도 비슷해서 꽤나 공감 가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어느 날 그 엄마와 술을 마시는데 살짝 취기가 오른 그녀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자기 출생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본인의 가족사, 본인 남편의 가족사를 물레에서 명주실 뽑아내듯 줄줄 뽑아내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임종을 맞이하신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다 나에게 털어놓고야 고해성사 같은 시간이 종료되었다.     

 

남의 가정사에 대해서 깊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할 때에는 본인이 그만큼 속에 맺힌 것이 있어서이겠거니 생각을 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동네 다른 집에 가서 “누구네 엄마가 글쎄~~!!” 하면서 떠들고 다니고 다닐만한 사람이라면 나에게 자신의 속살을 다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방적이고 원치 않는 타인의 내부사정을 다 알게 되고 나니 뜻밖의 반전이 펼쳐졌다. 그 엄마가 나를 피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슈퍼에서 마주쳐도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성의 없는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좀 서운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아직 내 얘기는 별로 하지도 않았는데, 모처럼 좋은 인연인가 싶었는데. 물벼락 맞고 상황종료된 기분이었다.           



어제 운동을 하러 가는 길에 차에서 ‘남인숙 작가’라는 분의 고민 상담 유튜브 채널을 들었다. 친구에게 손절을 당했다는 사연이었다. 한 친구의 힘든 일을 다른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고 바로 전화해서 위로를 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통화를 잘하고 나서 차단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사연자가 말했다.


작가는 안 좋은 일에 바로 연락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고 설명했다. 좋은 일은 연락해서 축하해 줘도 된다. 고민은 나누고 싶으면 먼저 연락을 해 올 것이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을 소문을 듣고 연락하면 누구도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란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댓글을 읽어보았다. 댓글 중에 작가의 설명도 일리는 있지만 ‘자신의 치부를 아는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는 글을 보았다. 그때 그 엄마가 생각났다.          



얼마 전에 캐나다에서 친해진 지인이 밥을 먹자고 연락을 해왔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간 나와 다르게 그녀의 얼굴은 초췌했다. 여름방학 내내 마음이 너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정을 나한테 다 털어놓고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배설의 시원함'을 왜 모르겠는가. 잘했다고 이제 마음이 편해지면 좋겠다고 해줬다. 속으로는 이 고백으로 우리의 관계가 소원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의 실패나 불행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 무심코 솟아나는 기쁜 감정이라고 한다.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은밀한 쾌감이라는 의미의 독일어이다. 시기심이나 질투에서 비롯되는 ‘샘통’이다라고 느끼는 감정은 동물 중에 인간만이 느끼는 고유한 감정이다.      


<샤덴프로이데>의 저자 나카노 노부코는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규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타인을 향해 ‘불쌍하다’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뉘앙스라고 하는 것을 다른 글에서 보았다. ‘불쌍하다’라고 느끼는 감정에는 판단이 들어가 있다.

     

마음이 힘든 경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생존자이다. 그러한 생존자를 바라보는 우리, 또 다른 생존자들은 타인의 고통을 ‘샘통이다’ 또는 ‘불쌍하다’의 마음보다는 인류애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지향하고자 한다.   

   

나는 타인에게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평가할 생각은 없다. 딱하다, 안쓰럽다, 어떻게 그러고 사냐 등등의 생각을 나이가 들고는 해 본 적이 없다. 어떤 놀라운 비밀이든 듣고 나면 그 자리에서 털어버린다. 그 사건을 상대방에게 면사포처럼 씌워놓고 바라보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사건은 발생한 일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열이 충분히 된 관계에서도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어색함을 담보로 한다. 예열도 안 된 상태에서 강불로 때우면 관계에 화상을 입게 된다. 요즘은 아무리 친해도 자신의 불행을 말하면 독이 되어 돌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털어놓고 났을 때의 해소감 역시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믿고 털어놓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는 털어내고 털어버리자. 아니면 성당의 고해성사 찬스를 이용하자.


나를 ‘너무 많이 알고 있어서 죽어줘야겠는(손절해야겠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를 바란다.





표지그림 : Edvard Munch, <The Girl by the Window>,1893




   

매거진의 이전글 씹고는 싶지만 질긴 건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