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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Oct 17. 2023

씹고는 싶지만 질긴 건 싫어

시폰 케이크만 먹고살 수 있을까?

 

내가 일본에서 살았던 것도 이제는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억지로 끄집어내어 심폐소생을 해본다. 기억의 인출 내용은 일본의 저출산 문제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를 인터뷰했는데 그중 한 사람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얼굴 하관이 유난히 좁다. 동양인이 선호하는 갸름한 얼굴형이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하관이 좁아진 이유는 유독 부드러운 음식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턱이 좁아져도 치아의 개수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일본인의 치열이 고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턱이 좁은 사람은 골반이 좁고 좁은 골반으로 인해 출산이 어려워졌다.           


위와 같이 일본 저출산의 이유를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실 출산은 골반이 넓고 좁고의 문제보다 골반의 유연함이 관건이다. 어쨌든 한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설명한 내용이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설득력 있게 들렸다.     

      

내가 음식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기 시작한 건 출산 후부터이다. 아마 많은 엄마들이 공감할 것이다. 아기가 잠들었을 때 비로소 엄마의 식사 시간이 찾아온다. 여유 있게 매 숟가락질마다 30번 이상 씹으면서 맛을 음미할 시간 따위 없다. 공습경보와 같은 아기의 울음소리가 언제 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루는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끓였다가 한 젓가락 먹고 공습경보가 울린 적도 있다. 아기의 민원을 처리해 주고 오니 라면은 가락국수가 되어있었다.      



술을 끊고 나서 나의 식습관에 크게 변한 두 가지가 있다. 예전에는 모든 음식이 ‘핵’ 매운맛이어야 먹은 거 같았다. 캅사이신을 집에 사다 두고 음식에 뿌려먹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슈퍼 아주머니가 캅사이신을 찾는 나에게 “여기 있긴 한데....... 이렇게 매운 거 먹지 마세요~”라고 해서 같이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고기를 안 먹게 되었다. 고기는 최고의 술안주였다. 고기의 기름이 독한 알코올을 중화시켜 주어 더 많은 양의 술과 고기를 탐닉할 수 있었다. 반대인가? 알코올이 고기의 기름을 중화시켜 주는 건가? 둘 다.     


술과 절연하고 고기를 먹을 때마다 고기 특유의 냄새가 거북했다. (이건 나의 부친을 닮았다) 나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고기를 싫어했다. 맛이 없단다. 내가 임신했을 때 고기 냄새도 못 맡았는데 진짜 그런 영향이 있나 싶기도 하다. 아들도 고기를 안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기반찬을 준비하지 않게 되었다. 

     


PT를 시작하고 트레이너가 고기를 더 먹기를 권했다. 부챗살이 좋다고 자주 구워 먹으란다. 모범생 병이 도져서 바로 한인슈퍼에 가서 부챗살을 사다가 구웠다. 한 입 크기로 자른 고기를 입에 넣고 몇 번 씹다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 씹은 채로 꿀떡 삼키거나 질긴 부위는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비단 먹을 것뿐이 아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일들인데 빠른 결과를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해서 악보를 펼치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양손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따로 연습을 해야 함에도 몇 번 쳐 보고 두 손을 합쳐서 레슨을 받으러 간다. 여지없이 “손 분리해서 다시 연습해 오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예전에 친구 중에 미드를 세 달째 보는데 영어가 전혀 늘지 않는다고 한 녀석이 있다. 자기 친구는 미국 유학 가서 세 달 정도 지나니 귀가 트였다고 했단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 따로 문법이나 어휘 공부는 하면서 미드 보는 거냐고. 순진한 내 친구는 그냥 보면 들리는 거 아니냐고 했다. 


행동주의 이론에서는 언어 습득이 후천적인 것이라고 한다. 주야장천 맥락을 이해하며 듣다 보면 언젠가는 들리는 날이 오긴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단순 노출을 통해서만 모국어를 습득하듯 익히려면 수개월이 아니라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노암 촘스키의 언어 생득주의 이론에서 보면 모국어 습득 능력은 사춘기가 되면 끝난다고 한다. 친구는 생득 한 언어 능력을 한국어에 올인했다. 미드를 자막 없이 보려면 영어 문법에 따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요즘 미국에서 냉동김밥이 빅 히트를 쳤다. 그 뒤를 이어 김치를 집에서 담가먹는 미국인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김치를 “시간이 빚어낸 건강식”이라고 부르며 각광을 받고 있단다.      


즉각적인 보상은 부작용을 초래하고 시간이 빚어내는 것들은 결국 그 가치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일, 공부, 글쓰기, 취미, 운동 그리고 대인관계. 

 

술만 끊으면 당장 가족 관계가 개선될 거라는 생각. 술로 인해 얻은 체지방과 몸의 문제가 한두 달에 제거가 될 거라는 생각. 되새김질 없이 언어를 습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심리 상담 몇 회 만에 삶이 미라클 하게 변할 거라는 생각. 저작운동을 거부하고 부드러운 음식만 추구하다 저출산 문제를 직면하게 된 일본(믿거나 말거나?).


축지법을 하면 가고 싶은 곳을 빨리 갈 수 있으니 편할 것 같다. 그런데 축지법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야 할까. 


영화 <패왕별희>에서 샤오라이즈가 아이일 때 다른 극단의 경극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공연자들의 아름다운 연기를 보고 아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와~!! 얼마나 연습했길래 저렇게 멋진 연기를 할까, 맞기는 또 얼마나 많이 맞았을까!!!" 나는 '맞았을까'가 아니라 '많이'에 방점을 찍고 싶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을 감내했을까를 생각한다.(고통이 폭력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씹고는 싶지만 질긴 건 싫다?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덥석 삼키면 위는 과로하게 된다. 씹기 귀찮다고 뱉어버리면 필요한 단백질을 얻을 수 없다. 언제나 달고 부드러운 시폰 케이크만 먹고살 수는 없다. 영양가 없는 달콤한 보상만을 바랄 수는 없다.


귀찮음과 불편함을 감수하고 충분히 꼭꼭 씹어주겠다. 나의 근육이 더욱 튼튼해질 수 있도록. 보다 양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표지그림 : 영화 <패왕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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