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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l 14. 2019

아침 산책길

제주살이의 사치

남편과는 자주 산책을 했었다.

먼 과거로 올라가 대학생이었던 우리 둘의 데이트 시절, 남들 다 가는 영화관이나 비디오방, 노래방, 술집도 물론 많이 갔지만 당시 살았던 우리집 근처 대공원 산책도 빠지지 않는 데이트 코스였다. 항상 자금이 부족했던 학생신분으로 대공원 데이트는 더할 나위없는 가성비 갑의 선택지였다. 그 넓은 대공원을 걸어 이런저런 동물들을 보고 푸르른 나무그늘을 벗삼아 산책을 하고, 동물원을 나와 바로 건너편 호숫가를 돌며 의자에 앉아 둘이 이어폰을 나눠끼고 음악을 듣곤했다.

신혼때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던 오래된 낡은 아파트에선 남편의 퇴근후 이른 저녁을 먹고 아파트 뒷편 개천가와 건너편 약수터를 오가며 산책을 했다. 배가 불러오는 새색시와 남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그날 있었던 일들과 읽고 있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 끝도 없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20여년간의 결혼생활중 극도로 안 좋았던 중반, 우리의 산책은 없었다. 서로 얼굴만 봐도 일그러지며 으르렁대기 바빴기에 숨막혔던 그 시간 속에 산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의 재회 후 처음으로 시작한 건 바로 산책이었다. 당시 혼자 살던 나의 오피스텔 근처를 다시만난 우리 둘은 손잡고 걸었고 혼자 몇개월을 살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오피스텔 근처에 작은 개울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늦은 나이에 둘째를 임신하고 퉁퉁 부은 다리로 회사를 오가던 때도 저녁이면 무더위를 피해 남편의 손을 잡고 동네를 돌았다. 노산일수록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된다는 우리의 의지도 있었고 에어컨도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아파트, 5층 집에서 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살았던 미국에서도, 또 필리핀에서도 우리는 저녁이면 항상 산책을 했다.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고 무일푼으로 돌아와야 했던 필리핀 앙헬레스에선 닥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불타는 일몰앞 저녁 산책길에 주저앉아 통곡도 했었다.  


이런저런 다양한 곳에서 물질적으로 가진 것 없는 우리 부부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화려하면서도 작은 사치, 그것은 바로 '산책'이었다.


 다시 제주살이를 시작하고 난후,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산책을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이와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저녁산책도 좋아하지만, 우리 부부가 정말 좋아하는 건 이른 아침의 상쾌함을 가득 머금은 둘만의 '아침산책'이다. 예전 제주시내에서 살던 첫 제주살이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상쾌함과 고요함, 청명함과 만족감 그 모든 것을 이곳 아침 산책길에서 원없이 느끼고 있다.

 


아직도 잡초와 꽃, 나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남편과 나는 산책길에서는 보는 꽃들에 그대로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무지랭이인 우리 눈에도 하나하나 어쩜 그리도 신기하고 오묘하며 어여쁜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름모를 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린다. 그저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그 꽃들 사실은 누군가의 세심한 정성의해 심어지고 가꿔진 거란 걸 우리는 나중에야 알았다. 자기 집도 아니요, 자기 땅도 아닌데 길가는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자비를 들여 묘목을 사다 옮겨심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어느 분의 배려심에 진심으로 고개 숙이고 감사하는 법도 배웠다.


 


바람불면 바람부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맑은 날은 맑은대로 우리의 산책길에서 마주하는 하늘은 매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파아란 하늘, 안개가 자욱한 날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의 운치는 또 얼마나 멋진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두려움까지 밀려들면 단지 두발로 걷는 돈 안드는 산책길에 혼자 너무 갔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난다.



우리의 아침산책길에선 역시나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고간다.

우리 가정의 재정상태부터 진행하고 있는 사업의 기획, 고객에 대한 불만 또는 일정부터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 읽고 있는 소설과 듣고 있는 노래, 각자의 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추억들과 지인들 이야기까지 참으로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기생충이 천만 갈것 같아?"

"당연한 거 아냐? 칸영화제 수상도 거머쥐었고 감독이 봉준혼데? 예술영화라기보단 봉준호 감독은 그래도 대중성을 지향해왔잖아."

"천만은 못갈꺼야. 소재 자체가 천만영화가 아니야. 사람들은 좀더 말랑말랑한 걸 원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그 한계가 있어."

"에이. 우리가 보기엔 너무 잘 만든 영화였잖아. 이런게 천만 안가면 어떤 영화가 천만 가겠어? 난 천만 간다에 내 손목아질 걸겠어."

(결국 영화 기생충은 천만 고지 앞에서 멈춰섰고 다행히도 내 손목아지는 아직 붙어있지만 그날의 남편과의 대화는 씁쓸하게 씹혔다. 역시 사람들은 불편한 이야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구나. 그것이 비록 지독히도 콕콕 와박히는 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케팅 없이 가능한 사업이 있을까?"

"글쎄. 아이템이 아무리 좋고 아이디어가 훌륭해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그냥 나는 자연인이다 컨셉 아닐까?"

"정말 좋은 의도로, 정말 좋은 제품을, 정말 좋은 가격에 판매한다면 언젠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유토피아적인 소리지. 결국은 어떻게 포장해서 얼마나 많이 알리느냐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어떤 곳이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정작 사람들은 그런건 관심없어. 보이는데로만 믿고 싶을 뿐이지. 마케팅과 홍보는 결국 돈이고. 돈 없이는 계속 힘든거지."

"그럼 돈 없는 우린 어떻게 해야하지?"

"당장 뭐 어떻게 되겠어? 꾸준히 지치지 않고 하다보면 뭔가 하나씩 수가 보이겠지. "



"더글라스 케네디 책은 언제 읽어도 날 실망시키지 않아. 난 그 사람 팬이야. 어쩜 그렇게 위트있는 문장을 쓰지?"

"그건 너랑 취향이 맞으니까 그런거지.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사설이 너무 길기도 해."

"아니지. 오로지 사건 중심으로만 이야기가 급박하게 흘러가는 당신과 내가 읽은 그 수많은 추리소설들, 지금 제대로 제목이나 기억나는게 몇이나 돼? 단숨에 읽었어도 책장 덮고 나면 몽땅 잊어버리게 되던데. 꼭 사건중심으로만 씌여질 필요는 없는거 같애."

"그렇긴 하지. 여운이란게 없지. 그런 책들은. 내용도 비슷비슷하고. 더글라스 케네디만 해도 공통된 주제나 소재는 있더라고. 미국 상류층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 같은거. 자국인 미국을 비난하는 듯 하면서도 결국 그 사람도 그 우월의식과 자존심은 못 버리는 거 같더라."

"뭐 미국이라고 다르겠어? 상류층의 그들만의 세상은 어느 나라든 다 존재하는 거지. 그 사람 소설은 시니컬하면서도 주인공들은 죄다 잘 배우고 전문직인 인물들이긴 해. 지금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필리핀에서 겪은 일도 한국이라고 다를까 싶긴 해. 사람 사는건 다 똑같은 거 같애."

"필리핀 한인타운 분들은 다 잘 계실까? 그땐 그 사업자들 다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제주도도 타운하우스 봐봐. 거기랑 뭐가 달라. 모르고 덤비면 당하는거지. 사실 사업이란게 사기와 종이 한장 차이잖아."

"그러게. 여기도 타운하우스는 이제 그만 지었음 좋겠. 다 어찌 감당할려고 그럴까? 부동산 경기 하락하면 흉물로 남을 수도 있는데."



"나 이제 제주도 사람 다 됐나봐. "

"뭐 법적으로 도민 된지는 좀 됐지. 근데 왜?"

"얹그제 서울 다녀왔잖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리무진 버스타러 공항을 걷는데 아 글쎄, 나도 모르게 걸음이 엄청 빨라지는거야. 그리고 마음이 막 조급해지는거야. 주변 사람들도 막 빨리 걷고 눈앞에 버스는 계속 오고 사람들이 엄청 많고. 갑자기 내가 그동안 이렇게 게으르게 살았나 싶으면서 심장이 벌떡거리더라고. 내가 이렇게 천천히 걸을 때가 아닌데 하면서 머릿속에선 그동안 생각만 하던 일들을 빨리 헤치워야겠단 조바심이 막 들고. 버스타고 나서도 잠이 안오는거야. 머릿속에 생각들이 휙휙 막 날아다니고 결국은 머리가 지끈지끈 하루종일 아팠어."

"서울가면 그런게 있더라. 나도 느꼈어."

"근데 더 웃긴건, 제주도 오는 비행기 타고 내려서 공항에 마중나온 당신 차를 탄 순간, 갑자기 평온해지는거야. 마음이 안정되면서 바깥풍경만 눈에 들어오고 내가 하려던 것들이 갑자기 중요하지 않게 되버리는 거 있지. 뭐가 급하냐, 어차피 하나씩밖에 못하는 걸. 세상이 무너지냐, 누가 죽어나가냐 이러면서 천하태평이 되더라고. 그동안 제주도 사람들 너무 느리고 서비스 정신 없다고 불만이었는데 어머나, 내가 그렇게 된건가봐."

"어차피 한 가지씩밖에 못해. 그동안 많은 걸 한꺼번에 해왔다고 생각하는건 착각이야. 그때도 마음만 분주했지 한번에 하나씩만 했던거더라고. 제주도가 사람을 여유있게 만드는것도 물론 있지. 마음의 여유 아닐까?"

"그런가? 나 예전에 정말 빠릿빠릿하고 멀티였던거 같은데, 내 기억이 또 왜곡된건가?"

"너, 예전에도 빠릿하진 않았어."

"우씨..."




아침산책길은 한시간을 넘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 사오십분, 시간이 없어 짧은 코스로 돌면 삼십분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그 약간의 시간을 투자한 후 얻는 만족감과 효과는 기대이상이다.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땅에서 올라오는 기를 받는 느낌, 동네가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에서 오는 마음의 안정, 코끝을 스치는 바람과 꽃향기로 전해지는 새초롬하면서도 황홀한 느낌.


우리가 가지는 가장 사치스런 생활, 제주살이에서 절대 빠질수 없는 것, 오늘도 우리의 '아침산책'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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