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과일이야기
어느덧 올 여름의 더위도 막바지인듯 하지요.
마지막 절정을 향해 달리듯 요맘때면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에도 '그래봐야 너도 곧 떠나야 할 시간이야~'
이마에 송글거리는 땀방울을 손으로 쓱 훔치며 혼자 짐짓 무시해봅니다.
제주의 8월은 그렇게 뜨겁게 시작했다가 15일을 전후로 바닷물도 차가와지며 가을맞을 준비를 한답니다. 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더위와 갈증도 달이 차고 기울면 지나가지요. 사십해가 넘도록 반복되는 일임에도 신기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마냥 뜨거울것만 같았던 지나간 우리들의 젊음처럼 말이예요.
8월의 제주는 다가올 귤철에 앞서 한차례 젊은 귤들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다름아닌, '청귤' 소식이예요.
언제부터였던가?
제가 첫번째 제주살이하던 7년전만 해도 청귤이니 풋귤이니 하는 건 없었더랬어요. 여름에 나는 못생기고 시큼하고 쓴 맛의 하귤은 간혹 오일장에서 볼수 있었지만요.
다시 육지로 올라간 이듬해, 제주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이 직점 담근 청귤청 두 병을 보내줬어요. 예쁜 유리병에 담긴 정성들여 썬 상큼한 파란 귤이 택배로 배달되어 왔어요. 뽁뽁이로 꼼꼼히 싸서 보낸 병들은 육지까지 오는 길이 힘들었는지 결국 하나는 깨져서 귀하디 귀한 청이 택배상자에 흐르고 있었지요. 아쉽게도 깨진 병 하나는 버려야 했어요. 남은 병 하나는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고 생수와 얼음, 또는 사이다와 함께 그해 여름 더위를 달래주었답니다.
전 그때 청귤청을 처음 알았어요. 벌써 5년전 얘기예요.
청을 보내줬던 동생 말로는 그때 제주도 엄마들 사이에서 청귤청이 핫했다고 해요. 귀한 청귤을 구해 청을 담구고 아는 분들께 선물해주는 일이 유행이었다고 했었지요.
그때 먹어본 청귤청은 사실 좀 묘했어요. 유자청처럼 달콤하지도 않았고, 레몬청처럼 새콤하지도 않았어요. 상큼하면서도 뒷맛은 쌉쌀했고 톡쏘는 새콤함이 아닌 부드러운 신맛이라고 해야 할까요?
청귤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온순한 차도녀'의 느낌이었어요.
레몬에이드에 익숙했던 아이들에겐 굉장히 밋밋한 맛이었나봐요. 처음 맛보고는 그 담부턴 굳이 찾아먹으려 하진 않더군요. 저 역시도 한 병을 다 먹고 난후 더 사서 먹을 생각은 안했더랬지요. 그땐 뭐 일상이 너무 바쁘기도 했고 제 생활에서 제주는 아주 머나먼 별의 그리움 같은 동떨어진 느낌의 각박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입맛도 변해요.
고소고소한 나물도 좋지만 쌉싸레한 나물을 찾게 되고 쓰게만 느껴졌던 한약재의 단맛도 알게 되었지요.
입에 달고 살던 과자와 쵸콜렛도 몸에서 받질 않으니 멀리하게 되고, 죽어서야 끊을것만 같았던 술도 이젠 거의 입에 대지 않아요. 처음이 주는 강렬한 맛보다는 이제는 먹고 난 후의 여운이 남는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 오래도록 기억납니다.
지난해 저농약 감귤의 인연으로 올 봄과 여름까지 꾸준히 제주의 야채를 맛보게 해주신 곽지농장에서 청귤을 좀 주셨어요. 금방 딴 청귤은 탁구공처럼 알도 작고 단단하며 푸르다푸르다 못해 검푸른 색입니다.
사실 이 귤의 정확한 이름은 '청귤'이 아닌, '풋귤'이예요.
제주에 살다보니 귤 종류를 엄청 다양하게 접하게 되는데요. 그 차이 잠시 짚고 넘어가볼께요.
덜익어 껍질이 초록색인 감귤로 미숙감귤이예요. 그동안 시중에서 유통되어 온, 청귤이라고 불리웠던 '초록귤'의 대부분의 명칭은 사실 청귤이 아닌 풋귤이랍니다. 감귤나무에서 한창 자랄때 아직 덜 여문 청춘의 아이들이지요.
청귤은 제주 고유의 품종으로 일반적인 다른 감귤과는 달리 꽃이 핀 이듬해 2월까지 껍질이 푸르다가 3~4월쯤 황색으로 익는 품종이예요.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제사용과 손님 접대용으로 이용됐었고, ‘탐라지’‘귤림봉진도’에서는 청귤의 껍질을 한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해요. 현재 청귤나무는 제주도내 7그루만 보존차원에서 잔존하고 있는 귀한 아이들이라고 하네요.
제주도 살다보면 가끔, 아주 가끔 '영귤차'를 드셔보실 기회가 있으실 거예요. 워낙 귀하디 귀한 품종이라 생산하는 농가가 많지 않고 가격도 비싸 접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영귤의 원산지는 일본 도꾸시마로 1980년대 즈음 제주도에 도입되었다고 해요.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의 옛 제주 이름인‘영주(瀛州)’의 ‘영(瀛)’을 따서 ‘영귤(瀛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저도 처음 접했을때 신선의 맛이라는 소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원산지 일본에서도 영귤은 장수과실이라고 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있다고 하네요. 영귤은 9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수확합니다.
그동안 제주도에서는 이 풋귤을 ‘미숙과’로 분류해 유통을 금지했고 제대로 된 이름도 없었다고 해요. 귤 농가에서는 생산량을 조절하기 위해 귤이 오렌지색으로 익기 전, 미숙과 일부를 따내는 열매 솎아내기를 하고 이렇게 따낸 미숙과는 모두 폐기 처분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귤 특유의 신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청귤이 온·오프라인에서 거래되기 시작했어요.청귤청, 청귤에이드 등 청귤을 활용한 가공 제품과 음료 메뉴 등이 새롭게 생기고, 청귤을 활용해 직접 요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청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거예요.
결국 제주도는 청귤에 대한 이 같은 수요 현실을 반영해 조례를 개정하게 됐는데요. 청귤의 유통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개정 조례안을 통과시키면서 매년 정해진 시기에 한해 이 풋귤(청귤)을 출하할수 있게 되었답니다. 2016년부터 재래종 감귤인 ‘청귤’과의 구분을 위해 ‘풋귤’ 이라는 정식 명칭과 함께 합법적인 유통이 가능해진건데요. 그래서 이 초록귤의 정확한 명칭은 '청귤'이 아닌 '풋귤'이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청귤'이라 불러온 습관으로 인해 '청귤'이 더 익숙해진 것이지요. (혼돈을 피해 그냥 '청귤'로 통일할께요.)
청귤의 사연을 따라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볼께요.
조선시대 제주 감귤은 왕가에 의해 관리 되었다고 해요.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감귤나무의 수를 일일이 기록했고, 그 수확물을 모두 거두어 한양으로 보냈다고 해요.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감귤이 제주에서 올라오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성균관과 사학의 유생들을 모아 시험을 보게하고 감귤을 나누어 주었을 정도였다고 해요. 그래서 이 시험을 황감제(簧柑製)라 불렀다고도 하네요.
이 때 관료들이 즐겨먹었던 재래 귤은 지금 대부분 사라지고, 그 중 '청귤'이라 불리는 품종이 남아있는건데 그 중 7그루의 청귤 나무만 남아 보존되고 있다고 하네요. 정식 청귤을 우리가 먹어볼수 없는 이유 되시겠네요.
제주 농가의 7~8월은 중요한 시기예요.
바로 귤이 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예요. 뜨거운 태양아래 과즙이 증가하고 당이 축적되는 기간이지요.
8월에 수확하는 청귤은 7월에 비해 신맛은 줄어들고 단맛은 높아져 단맛과 신맛이 공존합니다. 그냥 먹기에는 껍질이 딱딱하고 신맛이 강해 청이나 효소를 담가 먹어요.
미숙과인 ‘청귤’은 완숙 감귤 출하 시기와 겹치지 않기 위해 정해진 날짜안에 출하된 것에 한해서만 유통이 가능해요. 그래서 제주의 청귤 시기는 한달로 그 기간이 정말 짧아요. 제대로 된 청귤을 만나기위해 8월에 서둘러야 할 이유입니다.
청귤은 레몬에 비해 비타민C가 10배나 높고 카로티노이드 성분과 펙틴이라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요.
이 성분들은 피부미용과 노화를 예방해주고 면역력을 강화시켜주며, 혈관을 건강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답니다.
풋귤은 지름 약 5cm 정도로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아서 까 먹기가 힘들어요. 또 힘들게 껍질을 까도 신맛이 강해서 그냥은 못 먹지요.
하지만 귤은 과육보다 껍질에 영양분이 더 많아요. 감귤 껍질을 진피라 부르며 한약재로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청귤은 껍질째 먹습니다. 풋귤일 때가 노랗게 익었을 때보다 항산화 물질인 ‘플라보노이드’를 약 10배 이상 함유하며, 플라보노이드 성분은 지방 분해 및 다이어트에도 도움을 준다고 해요.
청귤의 신맛은 감귤의 신맛과는 다른 신선함이 있어요. 레몬이나 라임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신맛을 내는 매혹적인 맛이랍니다.
청귤청을 담가봤어요.
단단한 과육에 칼이 닿는 순간 스며나오는 상큼하면서도 풋풋한 향기~
한순간에 주방 전체가 푸릇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지나친 망상일까요?
향기가 주는 효과는 실로 위대하니까요. 결코 망상이 아니었답니다.
preparation : 청귤 5kg 설탕 5kg , 유리용기
1. 청귤은 베이킹소다로 껍질을 문질러 깨끗이 씻은 후, 0.5cm 두께로 썰어주세요.
2. 준비된 청귤과 동량의 설탕은 종이컵 한 컵 정도를 남겨둔 후 볼에 썰어둔 청귤과 버무려 주세요.
3. 준비된 유리용기는 팔팔 끓는 물에 소독한 후 뒤집어 놓아 물기를 제거해 주세요.
4. 소독한 유리용기에 설탕에 버무린 청귤을 꾹꾹 눌러담고 그 위에 남긴 설탕을 뿌려 밀봉해주세요.
뜨거운 여름이 가기전에 시원하게 먹을 용도라 작은 병에 나누어 담고 냉장고에 고이 보관해 두었어요.
열흘에서 이주 정도면 먹기 알맞다고 하니 마트에서 탄산수 큰거 사다 얼음과 함께 에이드로 먹을 거예요.
아직 익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설탕과 함께 얌전히 담겨진 청귤의 자태를 보니 뿌듯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앙증맞은 청귤을 보고 있자니 덜 익었던 하지만, 풋풋했던 지난 젊은 시절이 떠올라 잠시 아련해졌어요.
8월의 제주는 뜨거운 여름의 절정에서 그렇게 풋풋한 젊음을 넘나들며 청귤의 향기로 자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