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살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후룩쥔장 Aug 20. 2019

너와 나의 연결고리

극한의 순간에선 언제나 김치찌개가 생각난다.

#1. 1995년 6월, 스위스 융프라우


 만년설로 뒤덮인 스위스의 아름다운 관광지 융프라우에 한국인 대학생 세명이 나타났다.

45일간의 유럽 배낭여행 중 중반을 넘어선 시기, 그들의 외모는 검게 그을리고 오랜 걷기로 근육은 단단해져 있다. 남자 두 명과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된 그들은 대학 선후배 사이로 남녀를 떠나 동성처럼 편안하고 친근해 보인다.

융프라우까지 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길, 관광객 일부는 열차를 이용하고 또 일부는 스위스 산길을 따라 걷는 도보를 택한다. 유럽 배낭여행족이라면 당연히 올라야 할 코스이자 빠질 수 없는 인증샷의 성지인 융프라우에서 어떻게든 정상을 밟고 사진을 남겼으니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아끼고 또 아끼는 절약뿐이다. 이미 올라가는 열차비용으로도 배낭족으론 많은 지출을 했다. 

햇살이 쏟아지는 여름의 스위스, 알프스 산자락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너무도 멋진 광경과 한없이 평화로운 낙원이지만 한편으론 맑은 산소와 함께 공복을 파고드는 배고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야, 진짜 너무 배고프지 않니?"

"맞아, 언니. 나도 아까부터 배고팠어. 우리 아침을 너무 부실하게 먹은 거 같아."

"나도 정상에서부터 배고팠는데.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거지?"

"그런 거 같아. 아, 산에 오니까 얼큰한 거 먹고 싶다. 산에서 먹는 건 다 맛있는데."

"우리 그럼 지금부터 돌아가면서 자기 먹고 싶은 거 하나씩  얘기하는 거 어때? "

"그래, 그거 좋겠다. 어차피 지금 먹지도 못하는 거 말이라도 해보자!"


한국을 떠난 이후로 그들이 제대로 된 한식을 먹어본 지 이십일은 지났다. 그동안 그들이 먹을 수 있었던 최고의 한식은 지난 프라하 유스호스텔에서 직접 요리해 먹은 '고추장 스파게티'가 다였다. 그것도 한식이라기보단 한국에서 싸들고 온 고추장을 넣고 파스타면을 비빈 퓨전음식이었다. 알프스 산을 중반쯤 내려왔을 때, 세명의 한국 대학생들의 '한식 배틀'이 시작되었다.


"닭볶음탕, 빨간 걸로 매콤하고 깻잎 꼭 들어가야 해."

"그럼 난 설렁탕, 제대로 푹 끓여서 진한 사골국물에 참, 거기에 프림 같은 걸로 장난치면 안 돼!"

"설렁탕 나왔으면 갈비탕이지. 큼지막한 갈비 들어가서 살들이 죽죽 찢어지는 걸로."

"곱창볶음, 곱창은 왕십리 양념곱창이지. 빨간 양념에 고추랑 마늘이랑 상추에 싸 먹으면 캬!"

"난 칼국수. 칼국수는 명동 칼국수가 최고야. 마늘 잔뜩 넣은 그 빨간 김치가 핵심이지."

"떡볶이, 이왕이면 즉석떡볶이로. 신당동 떡볶이 어렸을 때 진짜 많이 먹었는데."

"김치찌개, 우리 엄마가 해준 거. 신김치 넣고 보글보글 끓여서 밥이랑. 아, 먹고 싶다."

"나도.."

"아, 나도 우리 엄마 김치찌개."


이후로 셋은 말이 없어졌다.

엄마의 김치찌개를 말하는 순간, 파블로의 연상작용처럼 입안 가득 고여 드는 침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김치찌개의 자태에 셋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너무도 평화로운 알프스 산자락, 통나무로 지은 산장들과 내걸린 꽃바구니들은 당장이라도 모든 걸 버리고 들어가 살고 싶은 동화 같은 곳이었지만 그곳에 엄마의 김치찌개는 없었다. 그들이 돌아가야 할 한국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자 낭만을 끄집어내기엔 숨 막히는 전쟁터일 터였지만 그곳엔 그들의 어머니그들을 기다리며 끓이고 있을 김치찌개가 있었다.  



#2. 2004년 11월, 영국 런던


자정이 가까워오는 시각, 집으로 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몹시도 초조하다.

이곳은 영국, 런던에서도 외곽에 속하는 곳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한적한 주택단지다. 가까운 튜브 역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한 시간에 두 대 밖에 없는 곳, 그마저도 밤 10시가 지나면 막차도 끊겨버리는 곳.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친구들과 런던 시내 클럽에서 신나게 놀다 마지막 튜브를 타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이다.

서른 넘은 나이게 뒤늦게 영어를 배워보겠다고 영국으로 온 지 십 개월, 영어실력은 정체되고 있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다니던 일식당 알바일은 지난달로 끝을 냈다. 그녀보다 많게는 열 살이나 어린 동생뻘의 다른 나라 친구들과 어울려 클럽에서 신나게 춤추고 돌아가는 길, 그녀는 그날 저녁 빈 속에 클럽에서 마신 술로 그 밤, 속이 쓰려왔다. 아무도 없는 길,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비추는 옆으로 어두컴컴한 공원이 어둠의 입을 벌리고 있었다.


'저 공원을 가로질러가면 지름길인데. 근데 지금은 너무 어두워 갈 엄두가 안 나네.'


갈등 끝에 결국 그녀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대신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달빛만이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는 밤, 그녀의 오른쪽 뒤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달빛을 받아 기다린 사내의 그림자가 그녀의 곁에 드리우고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그녀는 얼마 전 함께 살던 영국인 동거남에게 살해되어 토막시체로 발견된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녀 뒤로 그 남자의 그림자도 빨라진다. 그녀는 메고 있던 배낭 앞주머니에 달린 작은 물건을 손으로 매만졌다. 연수를 마치고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간 룸메이트 동생이 그녀에게 주고 간 호신용 호루라기였다. 호루라기를 매만지면서도 이 물건을 쓸 일은 없기를 그녀는 맘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잠시 그녀의 발걸음이 느려진 틈을 타 남자의 그림자 느려지는 듯 하더니 바람처럼 그녀 곁을 스치고 지나 저만치 앞서간다. 그녀의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다시 올라붙는 소리가 난다. 그녀를 지나쳐 멀어져 가는 그 역시 이 밤, 늦은 귀갓길에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잠시 동안 졸아들던 심장의 여파로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한다. 살았다 싶은 그 순간에 쓰려 오는 속과 함께 갑자기 '엄마의 김치찌개'가 간절해진다.  


코 끝을 싸하게 감싸 오는 11월의 가을밤, 런던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미치도록 그다. 이 쓰속과 놀란 가슴과 자꾸만 아려오는 그리움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엄마의 김치찌개뿐이다. 그 밤, 엄마의 김치찌개를 먹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원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어둡고 달빛은 밝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그녀는 혼자 울컥 눈물이 차올라 콩콩 뛰는 가슴을 한참 동안 꼭 눌러야 했다.




#3. 2017년 12월, 미국 오렌지카운티


겨울이 돼도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사시사철 따뜻한 기온이 가득한 미국 서부, 그중에서도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이곳은 오렌지 카운티다. 좋은 학교와 깔끔한 주택들이 늘어선 동네, 유독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며 5년 전 이혼했던 남편과 다시 재결합한 그녀가 딸아이와 함께 다시 잘 살아보기 위해 찾은 곳이기도 하다. 이미 그들보다 10년 먼저 와 이제는 자리를 잡고 나름 성공하여 살고 있는 남편의 선배는 예쁜 아이들과 손도손 살고 있는 수영장 딸린 넓은 타운하우스로 그들을 초대했다. 한국에서 모든 걸 처분하고 두 개의 이민가방만 달랑 들고 온 그들은 그 넓은 타운하우스에 한 달 동안 얹혀 지내다 얼마전 그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나왔다.


한국에서 가져온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어 이사 온 아파트는 휑했다. 엇보다 당장 음식을 해 먹는 일이 급했다. 그리고 12월에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캘리포니아 날씨에 상하지 않게 음식을 보관해 줄 냉장고가 절실했다. 이런저런 가구들이야 이케아 같은 곳에서 싼 것들로 골라 채우면 되겠지만 역시 가전제품은 그들에게 부담되는 품목이었다. 이제 아홉 살 된 딸아이를 굶길 수도 없어 이사한 바로 다음날 그녀는 한인마트에서 배추와 고춧가루 등을 사 김치를 담갔다. 이혼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지난 5년의 시간 동안 다른 주부들처럼 그녀 역시 이런저런 요리들을 해 왔다. 그럼에도 한 번도 김치는 담가보지 않았던 이유에는 가까이 살던 친정엄마의 때마다 해 나르던 김치들 때문이었다. 김장김치는 기본이오, 봄이면 돌나물 김치부터 햇배추김치까지, 여름이면 열무와 파, 오이소박이에 고들빼기며 총각김치 등 온갖 김치를 해 날랐던 그녀의 엄마였다. 때론 집에 쌓여가는 김치가 버거워 그녀는 엄마 몰래 버린 적도 많았다. 그저 갖다 주는 김치를 먹을 줄만 알고 이번 김치는 맛이 있네 없네 타박할 줄만 알았던 막내딸은 이제 자신의 어린 딸을 위해 처음으로 김치를 담그고자 팔을 걷어붙였다. 인터넷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 친정엄마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물었다. 그리고 한인마트에서 사 온 배추 한 포기와 고춧가루, 마늘과 새우젓을 플라스틱 대야에서 버무렸다. 한입 맛 본 맛은 그녀가 익히 알던 김치와는 사뭇 다른 맵고 쓴 맛이 나는 정체모를 빨간 음식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모름지기 김치란 익으면 다 맛있는 거지.'


냉장고가 없어 그나마 집에서 가장 서늘해 보이는 현관 옆 창고에 김치통을 놓아두었다. 한낮의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햇살로 인해 다음 날이 되자 창고에서부터 솔솔 김치 익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를 킁킁대며 고이 모셔둔 김치통을 들고 그날 저녁 당장 김치찌개를 했다. 마트에서 급하게 사온 쌀과 김, 참치캔과 고추장, 그리고 그녀의 김치찌개가 그날의 저녁 식탁에 차려졌다. 찌개가 끓는 내내 아무리 맛을 봐도 서른 해가 넘도록 그녀가 알던 김치찌개의 맛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날의 식탁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김치찌개 맛이 나."

한 숟가락을 떠 맛을 본 딸아이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눈을 빛냈다.

"그래? 난 아무리 먹어봐도 그 맛이 안 나는데. 김치 같긴 해?"

겸연쩍어하며 멋쩍게 웃는 그녀에게 딸과 남편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니야. 김치 맛이 나. 맛있어. 거짓말 아니야. 그치?"

남편과 딸아이는 서로 쿵작이 맞아 즐거워하며 그날 저녁밥 한 공기를 쓱싹 해치웠다.


'엄마, 나 김치 성공했어. 다들 맛있대. 엄마 덕분이야. 그런데 난 왜 엄마 김치찌개가 이렇게 그립지?'

숟가락 가득 찌개를 떠서 넘기는 그녀의 목울대가 꿀꺽 그리움과 함께 삼켜졌다.




#4. 2017년 2월, 필리핀 앙헬레스


필리핀에도 겨울이 있었다. 겨울의 필리핀은 물놀이를 하기엔 서늘했고 비도 자주 내렸다. 

그들은 지금 필리핀 앙헬레스에 있다.


한국 백화점에 입점했던 매장을 넘기고 오랜 준비 끝에 필리핀 대형몰에 입점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 필리핀으로 왔다. 그녀의 남편은 이미 6개월 전에 들어와 있었고 그녀와 늦둥이 막내 딸아이는 보름 전에 입국했다. 국제이사답게 이삿짐은 보름이 지난 어제야 필리핀에 도착했고 꼬박 이틀 동안 그녀는 일층과 이층을 오르내리며 짐 정리를 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하며 오픈할 것처럼 애를 태우던 그들의 매장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고, 그와 관련해 그들이 고용한 현지인 매니저는 처음과는 달리 오픈이 늦어지는 핑계만 댔다. 이젠 그들의 문자나 전화에 답하는 시간도 점점 늘어나 매니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애초에 현지인을 내세워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미 10년 전 이곳에서 면세점 사업을 크게 했다는 남편의 후배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보다 철저한 검증이 필요했었다. 일이 늦어지고 틀어지는 결과에 대한 이런저런 이유들은 점점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보살펴야 할 아이가 있었다. 마냥 손 놓고 망연자실 기다릴 수만는 없었다.


그들이 미국에서 무일푼으로 한국에 들어온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아이는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고, 이번 그들의 필리핀행에 대해 격렬한 거부극심한 반대를 했다. 결국 입학을 앞둔 큰 아이를 친척집에 두고 늦둥이 둘째만을 데리고 또 한 번의 무모한 베팅을 했다. 상황은 10년 전보다 더 안 좋았다. 이미 입국 전부터 사업은 지지부진해 있었고 필리핀은 10년 전 그들이 경험한 미국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의 후진국이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국은 결론을 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가진 모든 것을 걸었고 이젠 돌아갈 집도 없었다. 한국을 등지고 비행기에 오르는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한국에서 도착한 짐 중에 김치냉장고부터 가동했다. 덥고 습한 필리핀 날씨에 김치냉장고는 필수라 했다. 우기가 오기 전 배추를 한가득 사서 김치를 하고 김치냉장고 가득 쟁여놓는 것이 이곳 필리핀에서의 김장이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삿짐이 오지 않던 지난 이주 동안 그들은 오지 아닌 오지체험을 해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 썰렁한 집에서 굶을 수는 없어 한인마트에서 사 온 재료들로 그날그날의 음식을 만들어 먹다. 역시나 이 기온에 무엇보다 절실한 건 냉장고였다. 이삿짐엔 최신 양문형 냉장고부터 대용량 김치냉장고와 작은 스탠드형 김치냉장고까지 모두 있었지만 그 물건들은 아직 배에 싣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저 상하지 않을 음식들로 한 끼 먹을 만큼만 하고 바로 먹어 치워 버리는 방법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들의 짐이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한인마트로 달려가  배추와 새우젓부터 집어 들었다. 이미 고춧가루는 한국에서 떠나올 때 친정엄마가 꽁꽁 싸준 짐 속에 섞여 도착해 있었다. 김치냉장고를 가동하고 사 온 배추를 반으로 잘라 굵은 소금를 한 움큼 뿌렸다.  무와 쪽파, 마늘과 생강으로 버무린 속을 저린 배추에 발랐다. 친정엄마가 직접 키우고 말린 태양초 고춧가루는 그 고운 빛깔로 완성된 김치는 먹음직스러운 빨간 색에 냄새도 좋았다. 하루를 실온에 두었다가 김치냉장고에 옮겨 담고 몹시 아끼며 처음으로 썰어 김치찌개로 식탁에 내었을 때 남편과 딸아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 당신 이제 김치도 잘하네. 장모님이 해주신 거보다 더 맛있어 보여."

"엄마, 이거 너무 맛있겠다."

뿌듯한 마음에 밥 한술을 크게 뜨고 배추김치를 얹어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그녀의 코를 자극하는 큼큼한 냄새. 무어라 딱히 정의할 수 없는 그 냄새는 씹어도 씹어도 잔향이 남아 입 안에서 오랫동안 불쾌감을 주었다.

"음, 이게 뭐지? 뭔 냄새나지 않아?"

"그러게. 지난번 한인마트에서 샀던 그 맛없는 김치 냄새가 나는데? 그때 그 김치, 결국 못 먹고 다 버렸잖아."


그랬다. 지난번 손을 덜덜 떨며 한인마트에서 사 온 비싸디 비싼 김치에서 나던 냄새와 똑같았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던 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은 바로 '물'이었다. 필리핀의 물은 석회질이 많아 그냥 먹을 수가 없었다. 정수시설을 따로 해야 그나마 먹을 수 있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정수기가 필리핀 현지와 맞지 않아 아직 설치를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먹는 물은 생수를 사 먹거나 끓여 먹었는데 보리차를 넣고 끓여도 소독약 같은 그 냄새는 가시지 않았었다. 배추 씻는 물까지 생수를 이용하기에는 사 온 생수가 너무 아까웠다. 씻고 저리는 정도야 뭐 어쩔까 싶어 그냥 수돗물에 했던 건데 아뿔싸 그 냄새가 김치에 내내 배어든 것이었다.


모처럼 애쓴 김치에 소독약 냄새라니 그녀는 기운이 다 빠졌다. 게다가 김치는 김치냉장고 두 칸 가득 들어차 있었다. 비상식량을 쟁여둔 기분에 마냥 뿌듯했는데 결국은 먹을 수 없는 쓰레기만 가득 차 있다는 생각에 화까지 났다. 이렇게 고운 빛깔의 고춧가루를 썼는데, 이 고춧가루가 어떤 건데, 여름 내내 땀 뻘뻘 흘리며 우리 엄마가 따고 씻고 말리고 직접 방앗간에 가서 지키고 앉아 빻는 과정까지 본 후에 보내신 건데 딸인 나는 그 아까운 고춧가루를 결국 쓰레기 만드는데 보탠것이 아니더냐. 자책과 함께 그리도 허망하고 죄송할 수가 없었다. 

제일 똑똑하고 제일 많이 배워 누구보다 잘 살거라 기대하신 당신 딸은 영국이다, 미국이다, 제주도다, 필리핀이다 이리저리로 다닐 궁리만 하고 제대로 된 효도는커녕 아직까지 맘 편 잘 사는 모습 한번 못 보여드렸다. 사십넘은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받기만 하는 한심한 무능아는 이곳 필리핀에서 김치도 하나 제대로 못 담가 쓸데없 김치냉장고 전력낭비만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풀리지 않는 현지 사정과 맞물려 그녀는 서럽게 눈물이 났다. 

10년 전에도 미국에서 힘들게 만들던 김치찌개였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나 힘들게 김치찌개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쫄딱 망하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녀를 보는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 죄송했고 엄마인 그녀를 원망하며 한국에 남은 큰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녀만을 보며 이곳까지 따라온 작은 딸아이를 마주하면 가슴이 저릿했다.


며칠 후 모든 증빙이 되지 않는 현지인 매니저와 언성을 높이며 대판 싸우고 난 후, 그녀는그들의 사업이 모래 위에 지어진 성에 불과하단 걸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날 밤, 같은 타운하우스의 한국인들과 조촐한 송별회를 했다.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로 차려진 식탁에서 그녀의 김치는 소독약 냄새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격렬하게 환영받았다. 누구는 4억, 누구는 10억, 누구는 20억, 각자 사기당한 액수를 밝히며 그럼에도 이러고 살고 있다는 그들의 커밍아웃에도 그녀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밤,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많이 취했다. 




#5. 2017년 6월, 한국 경기도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실로 얼마만인지 지난 몇 개월의 시간들이 몇 년은 지난 것처럼 그렇게 아득하게 느껴진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그들에겐 갈 곳이 없었다.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그와 그녀가 함께 살던 지난 몇 달간, 그들의 딸들은 기숙사로, 아이들의 이모네로 그렇게 흩어져 지냈다. 그녀와 남편은 어떻게든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며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회복은 단시간만으로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가는 시간에도 그저 묵묵히 현실을 감내하며 살았다.

그들이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동네로 다시 돌아온 건 일주일 전이었다. 이미 그들이 살던 집은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임대를 주었고, 전세금으로 받은 돈은 모두 필리핀 현지에 투자되었다.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줄 마땅한 일자리는 없는 동네였지만 그래도 살던 곳이라 그곳이 그리웠다. 무엇보다 지난 몇 달간 낯선 곳에서의 거주 경험은 가뜩이나 지친 그들을 더욱 지치고 위축되게 만들었다. 비록 먼저 살던 곳보다 작은 평수의 월세 아파트였지만 지금 이 자리, 그녀와 남편 그리고 그들의 두 딸들까지 가족의 완전체는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오늘의 반찬은 김치찌개.

잠시 머물던 오피스텔에선 놓아둘 마땅한 공간조차 없어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들에게 보내지 못했던 김장김치를 그녀의 친정엄마는이사하자마자 손수 들고 찾아오셨다. 모름지기 한국사람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며 밥에는 당연히 김장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친정엄마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조촐한 식탁 위를 장식한 메인 음식은 역시나 그녀의 친정엄마가 주신 김장김치로 만든 김치찌개였다.


"크, 역시 맛있다."

"엄마, 너무 맛있어."

기숙사에서 방학을 맞아 돌아온 큰 딸과 이모네 집에서 주말을 맞아 집에 온 작은 딸은 연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으며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어? 넣을 거 없어서 참치캔만 넣었는데. 먹을 만 해?"

"정말 맛있어. 나 밥 더 먹어도 돼?"

"그럼, 밥 더 있어. 더 먹어."


참으로 소박한 밥상이었다. 냄비에 앉힌 흰쌀밥과 참치캔으로 뚝딱 만든 김치찌개, 그리고 마트에서 사 온 조미김, 고추장을 넣고 무친 비름 나름로 차린 저녁상. 그럼에도 집밥이 주는 따뜻함은 가족에게 이리도 큰 위로가 됐다. 엄마, 아빠,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의 완전체, 그 완전체를 위해 지난 6개월 동안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자리에서 눈물과 한숨을 삼키며 살아냈다. 아직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멀었지만 온 가족이 다 함께 둘러앉아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떠먹는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험난한 역경도 두렵지 않았다.

작은 아이의 밥을 더 떠 담으며 뿌듯하게 차오르는 행복감 속에서 그녀는 아팠던 지난 시간들에 잠시 울컥했다. 하지만 지금은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릴 시간이 아니었다. 그보단 다 함께 모인 이 순간을 즐기며 차오르는 벅찬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자. 밥이 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작은 아이 앞에  소복이 담은 밥그릇을 놓아주며 그녀는 몇 개월 만에 아픔 없이 활짝 웃었다.




2018년 11월, 제주도 애월


"엄마, 엄마가 해주던 김치찌개 어떻게 해?"

육지에서 대학을 다니는 큰 딸아이의 전화다.

"너가 웬일이냐? 이제 집에서 밥도 해 먹기로 한 거야?"

"갑자기 엄마가 해주던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져서. 지난번 보내준 김치도 아직 남았고."


아름다운 한국의 하와이, 이곳은 제주도다.

큰 딸아이는 그들과 함께 살지 않는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 다시 온 가족이 아파트에 모여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이곳 제주도 이주를 감행했다. 더 이상 육지에서 살 자신이 없었다. 육지의 소음과 숨이 턱턱 막혀오는 공기, 자동차들이 뿜어대는 매연과 사방이 막힌 회색빛 도시가 그녀를 숨 막히게 했다. 필리핀에서 돌아온 이후로 힘든 시기마다 그녀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제주를 떠올렸다. 그들이 한때 잠시나마 살았던 제주, 그 푸른 바다와 맑은 공기, 빛나던 꽃과 나무들을 떠올렸다. 떠올리고자 떠오른 게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훅하고 들어왔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녀를 위로해주던 건 다름 아닌 제주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갈 수 없을 것만 같았지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떠나올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 그들은 낡은 차 한 대에 필요한 짐만 대충 꾸려 큰 아이를 제외한 세 식구가 함께 차에 올랐다. 남쪽으로 달리고 달려 목포에서 배를 탔고 다음날 새벽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며 그렇게 제주에 도착했다.

그들이 육지로 떠나 있던 지난 7년 동안 제주는 좀 더 복잡해지고 좀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눈부시게 빛나던 제주의 햇살은 여전히 그들을 따사 로히 비춰주었고 온갖 꽃과 나무, 바다와 하늘이 그녀를 괴롭히던 도시의 회색빛을 대신했다. 서쪽 작은 마을,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마당 넓은 집에서 그들은 작은 아이와 함께 산책으로 아침을 열고 옥상에서 지는 석양으로 하루를 마감하며 그렇게 극한의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삶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제주의 삶 속에 큰아이는 없었다. 제주도로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큰아이는 모든 원망을 쏟아냈다.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그랬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기적인 엄마, 아빠를 맘껏 원망하고 저주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을 불쌍히 여겼다. 그들이 제주로 떠나는 당일에도 큰딸은 방학중임에도 학교 앞 자취방에 가서 오지 않았다. 방학 동안 잠시 제주에 다녀가라는 부모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과 원망만으로 답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떠나왔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죽은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것처럼 살고 싶었다. 큰아이는 이제 성인이었다. 이미 오래전 그녀는 성인이 될 딸아이를 보낼 준비를 마음속으로 마쳤다. 이제 부모가 통제하고 관리할 시기는 지났다. 이제 그들은 부모로서 그저 어디서든 믿고 지켜봐 주면 될 터였다. 딸아이의 인생은 이제 그들의 몫이 아닌, 아이의 몫이었다.


제주로 오고 난 이후 여름이 지나고 곧 가을이 왔다. 짧은 가을을 만끽하고 나니 이제 찬바람 부는 겨울의 초입이다. 아이는 엄마의 밥상이 그리웠나 보다. 그녀가 지난번 택배로 보내 준 이런저런 반찬들은 아직 딸아이 자취방 작은 냉장고 안에 그대로 남겨져 있을 터였다. 수업이다, 과제다, 데이트다, 학생회다 하여 자취방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일 것임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요리라는 것이 뻔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 하는 전화에 잔소리가 늘고, 먹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주섬주섬 이런저런 반찬들을 하고 있는 그녀 역시 갱년기를 앞둔 엄마다. 상하지 않고 오래 먹을 수 있는 반찬들을 골라 재료를 사서 다듬고 조리하고 택배로 보낼 생각에 손이 분주해진다. 챙겨 먹지 않을 줄 알면서도 과일이멸치상자 한편에 기어코 담아보낸다.


딱 이맘때였던 것 같다. 늦은 나이에 친정엄마 곁을 떠나 낯선 이국에서 엄마의 김치찌개를 그리워했던 때가. 그때도 지금처럼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아무도 없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 몹시도 외로웠더랬다. 그리고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가 그 먼 땅에서도 후각을 파고들며 못 견디게 먹고 싶었었다. 이제 성인이 된 그녀의 딸이 엄마인 그녀에게 그 그리움을 쏟아낸다. 다른 나라까진 아니어도 한번 오려면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곳, 큰 맘먹지 않으면 선뜻 오게 되지 않는 곳에 사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의 김치찌개 만드는 방법을 묻고 있다.


어릴 때부터 군것질은 싫어하고 밥과 김치, 찌개만 먹던 녀석이었다. 고기보단 나물을, 담백함보단 얼큰함을 좋아하던 녀석은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밖의 음식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먹는 매운 떡볶이, 곱창과 순댓국, 초콜릿 케이크와 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까지 그 전엔 멀리하던 음식들을 가까이하면서 하얗고 곱던 얼굴에 여드름이 올라오고 피지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피부 트러블에 시달리고 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엄마의 집밥임을 그녀는 알지만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난 일이었다. 아이가 스스로 깨닫고 노력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때가 되면 모두 알게 될 터였다. 그녀가 그랬듯이.


"김치찌개는 말야. 어떤 재료를 넣을 건지 우선 결정을 해야 해. 참치캔이냐, 돼지고기냐, 멸치냐. 참치캔이라고? 그럼 캔의 기름을 쪼르륵 따라서 송송 썬 김치를 먼저 볶아. 설탕 조금 넣으면 너 좋아하는 맛이 나니까 조금만 넣고. 그다음엔.."


모처럼 모녀는 정다운 통화를 이어간다. 김치찌개로 지난날의 원망도 눈 녹듯이 사라진다. 

지금 그녀와 딸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는 김치찌개다. 그녀와 친정엄마를 연결하는 것도 김치찌개였고. 

아이도 언젠간 이해해줄 것이다. 먼 훗날 이 연결고리를 끓이며 문득 엄마의 마음이 들여다보일 것이며, 사는 건 참 쉽지 않다는 걸 깨달으며, 사연 많은 김치찌개의 맛을 음미하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풋풋한 8월의 젊은 귤, 청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