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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l 05. 2019

호박계의 아기도련님, 미니단호박

제주의 야채이야기

노오란 호박죽이 달다. 죽은 커녕 끓인밥이나 누른밥도 싫어하던 입맛이 이제 나이 들어 문득문득 생각나곤 한다. 어릴적 엄마는 찬바람이 불면 집안에 고이 모셔둔 커다란 늙은 호박을 온 체중을 실어 힘겹게 자른 후 속을 파내고 커다란 솥에 푹 고아 호박죽을 만드셨다. 정해진 날은 없었지만 여름이 가고 찬바람이 불면 연례행사처럼 호박죽을 쑤셨더랬다. 늙은 호박이 귀했고 칼질이 힘들었고 양이 많아 큰 맘먹으면 하기 힘들었을 일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린 딸은 지금에 와 생각해본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이유식을 직접 해 먹이면서 단호박과 조금은 친해졌다. 예전처럼 커다란 늙은 호박을 힘겹게 자르는 수고를 더하지 않아도 단호박은 충분히 그 맛을 재현해주었다. 더욱 간편하면서도 더 달아진 맛. 그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일은 여전히 수고롭고 힘들었지만 현명한 주부들은 전자렌지라는 도구를 이용할줄 알았다. 전자렌지에 살짝 돌린 후 자르면 더 이상 단호박 자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아이들의 이유식의 시기가 지나고 한동안 단호박을 사지 않았다. 내 입맛에 따라 가족들 입맛이 길들여진 탓에 아이들도 물컹한 식감보단 매콤하거나 아삭하거나 쫄깃한 음식을 선호했다. 가끔 호박죽이 먹고 싶어질땐 시장이나 마트에서 파는 죽 한 그릇을 포장해 왔다. 만든지 시간이 좀 지난 그 죽들의 맛은 역시나 어딘가 싱겁고 인위적인 맛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가끔은 먹을만 했다. 



제주의 유월, 내가 살고 있는 애월은 단호박이 한창이다. 뜨거운 햇살아래 펼쳐진 너른 들녘엔 커다란 호박잎 사이 넝쿨에 달린 단호박이 땅바닥에 누워있다. 역시나 꽃인지 농작물인지 잡초인지 구분 못하는 우리 부부는 여전히 이것이 수박밭이냐, 콩밭이냐, 호박밭이냐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어느새 밭에는 미니단호박이 열리고 있었다.



 크기로만 보면 앞으로 더 커야 할 아이들이 아닌가 의심이 들지만, 이것은 종자 자체가 작은 '미니단호박'이다. 이 크기가 다 큰 상태로 수확 후 2주 정도 후숙해서 먹는 후숙야채다. 미니 단호박은 원래 일본에서 ‘보우짱’이라는 이름으로 재배되던 것으로 국내에 종자를 들여오면서 확산됐다고 한다. '보우짱'이란 뜻은 아기, 도련님이란 뜻의 일본어라는데 실물을 보면 아기도련님처럼 작으면서도 앙증맞고 귀엽다. 



제주의 미니단호박은 주로 애월지역에서 많이 재배한다. 그 이유는 단단한 토양의 질과 제주에서 가장 덥고 강력한 햇볕이 미니단호박의 당도를 높여주고 단호박 고유의 맛을 더욱 깊게 해주기 때문이다. 미니단호박은 일반 단호박에 비해 당도가 높다. 단호박의 풍부한 영양을 보다 효율적으로 섭취할 수 있도록 개량한 품종이기 때문이다. 단호박에 함유된 베타카로틴과 펙틴은 장의 기능을 원활하게 해줘 배변 활동을 돕고 높은 수분함량과 풍부한 섬유질은 갈증 해소에도 좋은 걸로 알려져 있다. 낮은 열량에 비해 영양가가 풍부해 다이어트 식품으로 인기인데 직접 먹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일단 맛이 있고 포슬한 식감이 좋으며 포만감이 상당하여 한 끼 대용으로 충분하다. 



모든 야채들이 그렇듯 이 미니단호박도 껍질에 영양이 많은데 강력한 항산화 물질인 페놀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기존 단호박은 껍질이 두껍고 질겨 먹기 쉽지 않았지만, 이 미니 단호박은 껍질이 연해 제법 먹을만하다. 껍질까지 먹을 때는 베이킹 소다를 이용해 깨끗히 세척한 후, 자르기 전 전자렌지에 가볍게 돌리면 보다 쉽게 잘라 먹을 수 있다. 아기가 어린 집에서는 이유식으로 좋아 냉동실에 쟁여두고 먹으며 조리가 간편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침식사 대용이나 간식으로도 좋다. 무엇보다 전자렌지에 5분만 돌려도 충분한 까닭에 간편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딱이지 싶다. 



전자렌지에 돌린후 마요네즈를 넣고 으깨어 단호박 샐러드로도 먹고, 믹서에 물이나 우유와 함께 간후 살짝 끓여주면 노오란 호박죽이 뚝딱 만들어진다. 좀더 호사를 부리자면 속을 파낸 단호박에 오리고기나 파스타를 넣고 모짜렐라 치즈를 올린후 오븐이나 렌지에 살짝 돌려주면 흘러내리는 치즈만큼이나 고급짐이 넘쳐난다. 양에 비해 가격도 착한 편이고 서늘한 곳에서 보관만 잘하면 두세달도 거뜬하니 이만한 가성비 갑인 야채도 또 없지 싶다. 이래서 제주의 또 하나의 야채가 주는 즐거움에 나의 여름은 맛과 멋이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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