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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Oct 18. 2019

타인은 지옥이다 & 조커

배려없는 사회에 대한 슬픈 자화상

#1.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뭐지, 이 드라마?
기괴하고 음침한데 묘하게 끌린다...



잔인한 살인마가 활보하며 미친듯이 터지고 튀는 피칠갑 영화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 영화들은 공포나 스릴감보단 지나친 폭력과 낭자한 피범벅으로 오히려 보는 내내 짜증을 유발시켰다. 진정한 섹시함이란 벗기는 것이 아닌, 갖춘 정장 속 어느 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진정한 공포나 스릴 또한 오히려 절제된 폭력과 억눌린 광기 그 어느 틈에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초반부터 대놓고 기괴함과 악마적 광기를 드러낸다. 노골적 피칠갑을 하면서도 왠지 짜증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쫄깃하고 심장이 벌렁거리면서도 짜릿하다. 

회가 거듭될수록 흥미진진한 이 드라마의 흡입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그건 다름아닌 도끼나 칼을 휘두르는 고시원의 무개념 살인마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고시원 밖, 사회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부대낌 속 분노가 극대화되면서 광기가 되는 모습을 개연성 있게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합리적 이유 없이 그저 살인을 유희처럼 즐기는 사이코패스들의 영화나 드라마는 공감하긴 어렵다. 그렇게 죽여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속 주인공은 어쨌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몰입도가 높아진다. 그 역할이 비록 쳐죽일 악역이라 할지라도.

'타인은 지옥이다'의 주인공은 사실 착하거나 정의로운 일반적인 주인공의 캐릭터는 아니다. 오히려 길가다 마주치거나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거나 사귀는 사이였더라면 꽤나 까칠하고 위험하며 재수없을 수도 있는 캐릭터에 가깝다. 흔히 말하는 사회성도 결여되어 있고 타인에 대한 친절함도 갖추지 않았다. 넉넉치 못한 가정환경과 작가로서의 꿈 사이에서 억눌리고 삐딱한 꼬인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마주하는 사회는 훨씬 더 짜증나는 일들의 연속이다. 믿었던 선배의 이중성, 처음부터 대놓고 괴롭히는 상사, 역시나 같은 이유로 피로감에 쪄든 여자친구와의 원만치 못한 관계등. 

이쯤에서 격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선배나 상사에게 불쑥 드러나는 저의.

 

저 인간 죽여버릴까?


사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요소 아닌가?

이유없이 나를 공격하고 험담하고 사사건건 못마땅해하는 직장내외 사람들이 꼭 한둘은 있게 마련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뭐가 문제고 어떻게 고쳤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해주면 좋으련만 은근히 들어오는 공격들은 이유도 모른채 스스로를 한없이 초라하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특히 여자들 사이에서 이런 묘한 기류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때 드는 억울함, 분노. 폭발하듯 맘 속으로 내지르는 악에 받친 내면의 소리.

'확 다 죽여버릴까?'

난 수십번도 더 외쳤었다. 생각만으로 범죄가 될수 있다면 난 몇번은 사형에 처해졌을 중범죄자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드라마의 회가 거듭될수록 고시원 밖이 더욱 지옥처럼 보였고 오히려 고시원 안은 안전해보였던 것은. 

물론 괴물을 통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 역시 또 하나의 괴물로 변질되어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지만

자기를 괴롭힌 이들을 폭행하고 죽이는 주인공 또한 또 하나의 살인마임에도 그가 행하는 폭력과 살인에서 오히려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래. 죽여버려. 널 괴롭힌 인간들을 싹 다 죽여."

응원하는 마음이 된다. 그동안 내가 당해왔던 괴로움과 짜증들, 어쩌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미움들을 대신하여 처리해 주는 것만 같아서. 타인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천국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날 괴롭히는 지옥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19금이다. 



#2. 영화 '조커'

사전지식은 없었다. 그저 예고편이 훅 치고 들어왔다.

예고편의 장면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계단에서 춤추는 씬이 몹시도 와 닿았다.

어떤 줄거리 없이도 장면 자체가 맘에 들었다. 그 구도, 색감, 표정.


이 영화는 보러 가야겠어!


왠만해선 극장행을 시도하지 않는다. 시내까지 나가야 하는 이곳 제주살이에선.

아주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면 조금 기다렸다 인터넷으로 본다. 그렇게 최근 본 영화들 중 성공한 영화가 하나도 없었다. 올해 본 영화중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기생충'이 유일했다. 역시 돈 주고 볼 만한 영화였다. 돈이 아깝지 않은 잔향이 오래 남는 영화, 그래서 남편과 인터넷으로 한번 더 봤었다. 

이후로는 모두 졸작, 망작들에 연속. 이 정도면 그냥 드라마로 만들어도 됐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맘이 든다. 드라마로 만들었어도 시청률은 저조했을 것 같긴 하지만.

조커는 그냥 맘이 끌렸다. 먼저 본 이들의 평을 보니 장난이 아니다. 슬슬 기대감이 밀려들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할터이니 최대한 무념무상을 유지하며 극장에 앉았다. 

평일 조조시간, 텅빈 극장 안에 남편과 나, 단 둘이다. 이 정도면 극장을 전세냈다라는 표현이 딱 맞을듯한 날이었다. 


아, 영화를 보는 내내 슬펐다. 너무 슬퍼서 울고 싶었다.


내가 알던 조커는 괴물, 악인, 무자비한 살인마였는데 이 영화의 조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의 조커는 하나의 소심한 인간,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소시민, 끝까지 희망을 가지려 노력했던 긍정주의자, 울고 싶었으나 웃어야 했던 이, 웃고 있으나 웃을 수 없었던 한 남자일 뿐이었다. 

인생이 해피이길 바랬던 사람, 그러나 현실은 해피하지 않았던 인생. 

믿었던 가족도, 동료도, 우상도 현실에선 배신과 술수의 난장판.

그의 얘기를 하려 했으나 누구도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고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세상.


아무 힘없는 그와는 달리 세상은 부와 권력을 가진 이에겐 관대했다.

시민들은 부와 권력의 상징, 웨인의 말에는 즉각 화답했고 웨인의 말엔 귀기울였으며, 웨인의 농담엔 웃음으로 환대했다. 그가 그토록 노력했던 다른 이들을 웃기려 했던 꿈은 웃음조차 결국 가진자들을 위한 전유물이 되어있었다. 

삐에로의 가면 뒤로 감춘 어릿광대의 슬픈 눈.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그 극한의 아이러니를 '조아퀸 피닉스'는 신들린 연기로 거침없이 표현해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모습의 그의 몸짓은 조커의 처절함을 배가시켰다.



압도적 장면은 역시 예고편에 살며시 보여줬던 계단씬이었다.

조커의 옷을 입고 분장한 얼굴의 조아퀸 피닉스는 한없이 자유롭게 춤을 춘다. 그 춤이 어쩜 그렇게 슬프고 아름답던지 눈물이 왈칵 날뻔했다. 

그 자유와 행복을 지켜주고 싶어서.

그가 추는 어릿광대의 춤이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내 모습 같아서.

팍팍한 현실에 그렇게 위태위태한 계단 위에서 힘겹게 버텨내며 어릿광대의 춤을 추고 있는 건 결국 나였다. 

그에 대한, 나에 대한 연민으로 그렇게 영화내내 슬픔이 밀려들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마천루가 빼곡하고 회색빛이 암울한 고담시, 누가 봐도 뉴욕시이자 서울시일수도 있는 도시는 빈부의 격차, 흑백의 논리로 가득찬 배타적이고 모순적인 장소였다. 서로의 모습을 보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듯하나 그 누구도 보지않고 그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 외로운 도시. 

그것이 어찌 고담시만의 모습이겠는가.

지금 서 있는 이곳에서의 너와 나의 모습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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