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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n 26. 2020

필리핀에서 사업하기

해외살이를 꿈꾸는 이들과 나누고싶은 이야기

제주에 살고 있는 #후룩쥔장 입니다.

몇년전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필리핀에서사업 했던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제 브런치에 이미 몇번 글을 올린적은 있는데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했어요. 실제적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머물며 털고 나오기까진 6개월 정도 걸렸는데, 그 안에서 겪은 일들은 10년동안 지낸것만큼 많아서 자세히 적다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처음부터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까닭도 있겠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쓰리고 마음이 아파서 반추하며 글을 쓴다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숙제 안 한 학생처럼 뭔가 찝찝하게 가슴 한켠 남아 있었던 그 일을 오늘에야 압축해서 해 볼까 합니다.




큰 아이가 고3때였으니 4년전이네요. 

당시 남편과 함께 했던 백화점 입점 매장을 정리하고 저희는 다른 사업을 준비 중이었어요. 우연한 기회에 남편은 필리핀 앙헬레스로 지인의 사업차 견학과 골프겸 3박 4일을 동행하게 되었죠. 현지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지인의 후배와 함께였고 그곳에서 향후 사업을 돌봐줄 현지인 매니저도 만났고 매장이 들어설 자리도 봤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지인이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겠다니 잘되면 나중에 놀러갈 생각만 했지 남의 일로만 알았던 그 일이 우리의 일이 될줄은 몰랐어요. 정작 하기로 했던 지인은 정리하려던 국내 사업이 꼬이면서 필리핀 사업을 할수 없게 되었고, 결국 남편과 후배라는 사람이 함께 하게 되었던 거예요. 


앙헬레스 클락내 필리핀에서 가장 큰 몰이라 할수 있는 #SM클락 에 입점을 추진했고, 국내 백화점 입점비용의 삼분의 일로 오픈이 가능하며 현지에서 직접 일을 처리해줄 믿을수 있는 현지인 매니저가 있다는 얘기에 자본을 투입하기 시작했어요. 

빠르면 보름 안에도 입점이 가능한 국내 백화점과는 달리, 입점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한지 몇달이 지나도록 일은 더디게만 진행되었어요. 초기 필요하단 금액과는 달리 소소하게 투자금은 자꾸 더 들어갔고, 남편은 한국이 아닌 현지에서 머물며 매장이 오픈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죠. 


'다음 달이면, 또 그 다음달이면' 오픈한다는 매장은 지연되기만 했고, 현지에 있던 남편은 자꾸만 자금을 더 이체해줄 것을 요청해 왔어요. 애초에 세웠던 계획보다 몇배의 금액이 들어가고도 마지막 얼마면 된다는 소리에 결국 저희 부부는 살던 집을 처분하고 남편의 새차를 잡혔으며 신용카드로 론을 받고도 현금서비스까지 받아 투자를 하고 생활비를 충당하게 됐어요. 작은 아이를 국제학교에 보내고 현지에서 매장을 관리하며 몇년간 좀 여유롭게 지내다 올 생각으로 집을 처분하고 국제이사를 감행했죠. 




크리스마스 당일, 작은 딸아이 손을 잡고 도착한 클락 공항에서 몇달만에 남편과 재회를 했어요. 

그 몇달동안 남편은 피골이 상접했고 얼굴은 초췌해졌으며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정도로 사람이 피폐해져 있었어요. 매장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관광객의 신분으로 매달 체류를 연장하고, 좁고 지저분한 필리핀 현지인 집에서 지내며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면목이 없어 하루 한끼로 버텼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그것도 모르고 한국에 있던 저는 저대로 몇달동안 수입은 없이 지출만 늘어가고 필리핀 이사를 반대하며 냉담으로 일관한 큰아이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에 보이스톡으로 연락온 남편에게 왜 빨리 매장을 오픈하지 않느냐며 화를 내곤 했어요. 할말 없는 가장은 그저 미안해하면서도 현지에서 직접 할수 있는 일이 없어 중간자인 매니저의 연락만 기다리다 점점 말라갔구요. 


제가 필리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동업자였던 후배라는 사람은 투자금을 구할수 없어 손을 떼고 한국으로 돌아간 후였어요. 초기에 우리에게 투자금을 빌리며 따로 차용증을 쓰지 않는 대신 혹시 나중에 급한 일이 생기면 쓰라며 맡겼던 그 명의의 한국에 있던 땅 문서는 필리핀에 들어가기 몇달 전 돈이 궁해 팔아볼 요량으로 조회해본 결과, 이미 예전에 모두 팔려나간 종이조각에 불과한 거짓 문서로 밝혀진 이후였어요. 매장에 대한 모든 권한을 넘긴다며 사라진 그를 대신해 남편은 어떻게든 매장을 오픈하려 했지만 그렇게 미뤄진거예요.


그래도 남은 건 매장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오픈하겠다 마음먹고 짐이 도착하지 않아 냉장고도 없는 휑한 집에서 남편과 아이의 밥을 해 먹이며 수습을 시작했어요. 모든 서류를 넘겨받고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던 저는 서류뭉치를 내려놓은 채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어요. 


 영문 서류들_unsplash


제대로 된 서류가 하나도 없었어요. 

뭐라고 갖추었을 줄 알았던 그 모든 서류들은 누구나 인터넷에서 손쉽게 출력할 수 있는 오픈된 정보들을 출력한 종이더미에 지나지 않았던 거예요. 그 어떤 서류에도 회사의 직인이나 대표자의 사인, 문서를 입증할 공신력있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어요. 


당연히 있어야 할 SM몰과의 계약서조차 필리핀에 초보인 제가 봐도 너무도 간단한 한장짜리로 진위여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보였어요. 아무리 낙후된 필리핀이라지만, 필리핀 내에서는 한국의 이마트 정도는 될 SM몰에서 계약서를 그따위로 작성할 리 만무했어요. 서류들에서 투자자이자 실질적인 경영주인 우리의 존재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오로지 매니저와 미리 셋팅해 두었다는 직원들의 권리에 대한 내용들뿐이었죠. 몇달동안 오픈이 미뤄지면서 급여가 늦어지자 급여를 지불해야 하는 이유와 그러지 못할 경우 부여되는 책임과 불이익에 대한 그 나라의 노동법을 출력한 서류거나 그 흔한 영수증 한장 없이 SM몰에서 요구하는 공사비용에 대한 단편적인 규정들로 이루어진 서류들이었어요. 


여차하면 법에 도움이라도 받으리라 생각했던 제 기대와는 달리 그 서류들은 아무런 증빙이 되어줄수 없음을 도착한 다음날 아침 깨닫고 가장 먼저 화가 난 건 남편에 대한 원망이었어요. 

한국에서도 매장을 오픈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필요한 서류들인데 외국은 오히려 더 꼼꼼히 살펴봤어야 하지 않았나. 그동안 남편을 믿고 당연한 이런 절차들은 알아서 확인했으리라 믿었기에 실망과 배신감이 엄습해왔죠. 한국에서 매장을 오픈해보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세네개의 매장도 오픈해 본 사람이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일처리를 할 수 있는지 정말 야윈 모습만 아니었다면 남편 먼저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아무리 봐도 서류상으론 워킹 비자가 없는 우리를 대신해 그 모든 서류에 이름을 올린 매니저에게 매장에 대한 권한이 부여될 수 있어 보였어요. 그동안 남편은 후배와 그 후배가 소개해준 현지인 매니저를 전적으로 신뢰하며 저의 우려에도 그럴리 없다 했지만, 제가 한국에서 온라인상으로 숱하게 봤던 '더미'가 바로 그녀이며 그것도 아주 불량한 의도를 갖고 접근한 '더미'임을 알수 있었죠. 




제 의심을 뒷받침하듯, 저와 딸아이가 필리핀으로 들어간 다음날 웃으며 집으로 한번 찾아온 이후로 그녀는 점차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약속한 시간에 처음에는 10분 늦더니 그 다음에는 30분이 늦어지고 또 그 다음엔 1시간, 1시간 반, 2시간까지도 작정하고 늦게 나타났어요. 전화를 안받거나 문자메세지에도 답하지 않는 경우도 늘어갔구요. 그동안 사용된 공사에 대한 영수증을 요구하는 제 요청을 묵살했으며, SM몰의 담당자와의 만남을 요청하는 제게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빠져나갔고, 제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까지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 놓았어요. 


사십해를 살아 오면서 정말 여러사람을 만나봤고, 짧게나마 기자와 헤드헌팅, 영업일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왔던 저로서는 '입은 속일 수 있어도 눈은 속일수 없다'는 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자부심도 그녀와 그녀의 직원들 앞에서는 와르르 무너졌어요. 

제가 본 그들의 눈은 너무도 선하기 그지 없었고 순수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넉넉치 못한 우리 형편을 듣고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진심어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예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진걸 모두 잃고 이민가방만 달랑 두개 든채 귀국하여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전 그들의 그 순수했던 눈을 잊을 수가 없어 아직도 혼돈이 와요. '그 눈은 진심이었을까?' 문득문득 자문해 봐도 제 확신으론 진심이었다 결론이 나요. 

그건 뭐랄까? 아마도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우리가 돈 없는 한국인이어서 나중에 실망을 했거나, 아니면 그들 나름은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믿고 있는 허언증 환자이거나 둘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항상 결론은 그렇게 나네요.


도저히 매장을 오픈하기 위해 더 투자할 돈도 없었고, 직접 가서 본 매장의 완성도가 매니저가 얘기하는 액수로는 턱도 없이 모자랄 거라 판단을 내린 저는 진행중인  매장을 팔기로 결심해요.

먼저 필리핀 한인카페에 매물을 올리고 살고 있던 한인타운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도 의사를 타진해요. 초기에 들어갔던 돈은 애초에 다 건질 생각은 하지도 않았기에 들어간 돈의 절반 가격으로 넘기려 했지요. 


SM CLARK 내부모습_이미지 ds4cine.tistory.com

한인카페를 보고 몇 사람이 연락을 해 왔어요. 근방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연락을 준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중에는 매장을 보고 우리를 만나기 위해 어린아이를 태우고 5시간을 달려 와준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들이 도착했을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재운 후 다음날 아침 SM몰로 갔어요. 매장을 보여주려 매니저를 불렀어요. 모든 열쇠와 권한을 갖고 있는 건 그녀였기에 그녀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으니까요. 매장을 넘기겠단 사실을 이미 통보했기에 누구보다 내용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그러나 당일 1시간 30분이 넘어서야 열쇠를 들고 나타났어요. 그것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수의사가 있던 한국인들은 늦게 나타난 그녀를 보고 모든 걸 파악했어요. 


이 매장을 인수받아도 그녀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이며,
오픈을 한다해도 그녀가 모든 전권을 쥐게 되리라는 걸요.


애초부터 모든 이름을 현지인 매니저를 걸고 한단 자체가 말이 안됐던 거예요. 이름이 걸린다는 건 금융거래도 그쪽으로 들어온다는 건데, 가뜩이나 카드가 아닌 현금만 쓰는 필리핀인들에게 받은 돈을 투명하게 우리에게 오픈할 리도 없을 뿐더러 직원들까지 합세해 우리를 속이는 건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을 테니까요.


워킹비자 없이 합법적으로 일할수 없는 한국인들을 이용해 이미 많은 현지인과 한국인들이 모종의 계약관계를 맺고 더미를 세워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런식으로 가게를 연 집 중에는 물론 서로 신뢰를 갖고 별 잡음없이 오랫동안 일하고 있는 곳도 많다 했지만 전 믿을 수 없었어요. 잘된 케이스도 물론 있겠죠. 하지만 그러기까진 오랜 세월동안 다져진 신뢰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며, 현지인 배우자인 경우이거나, 아니면 정말 돈이 많아 현지인들에게 돈으로 인심을 사는 경우였을 거예요. 대부분은 안 좋은 결말로 끝나거나 최악의 경우는 청부살인으로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경우를 한국에서 이미 많이 들어 알고 있었어요.




결국 매장은 더 진전되지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간만 지나갔어요. 

오픈을 못해도 SM몰에 매달 임대료가 나가고 있었고, 그 임대료는 한국 못지 않을만큼의 금액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어요. 그 임대료를 내지 못할땐 이름을 건 매니저에게 불이익이 있기에 매니저는 애달아하기 시작했어요. 우리에게 더이상 투자할 여력이 안 되면 매장을 포기하고 매니저인 자신에게 그 권한을 줄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들고와 사인할 것을 요구했어요. 


서류를 본 순간, 결국은 이거였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올랐어요. 

'결국은 네가 이런 식으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달려들었구나.'

죽어도 사인 못해주겠다 했죠. 이건 엄연히 네꺼가 아닌 내꺼라고요. 


그녀는 며칠 후 평소 보디가드처럼 데리고 다니는 한량 남편을 끌고 우리집에 나타났어요. 타운하우스 입구에는 총을 둘러맨 가드가 있었지만 현지인들끼리 하는 친밀한 소통앞에선 총은 한낮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죠. 문은 너무도 쉽게 열렸고 그들은 집앞에 차를 대고 여전히 서약서를 흔들며 사인을 하라 했어요.

조용한 타운이 그들과 우리의 언성으로 시끄러워졌어요. 마침 휴가를 받아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러 온 옆집 아저씨가 무슨 일인가 내려왔어요. 클락에서 사업차 잘 알고 지내는 동생과 한잔하던 중이었는데 우연히도 그 동생이란 사람이 이 매니저를 잘 알고 있었어요. 클락은 좁은 곳이고 한국인은 그 네트워크가 더욱 좁았으니까요.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는 몹시 험악해졌을 거예요. 나중에 그 동생분을 통해 전해들은 얘기로는 그 매니저는 우리뿐만 아니라 클락 한인들 사이에서 이미 그런식으로 사업을 빌미로 돈을 가로챈적이 여러번이고 한인회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그 백을 믿고 더욱 기고만장하게 군다는 걸 들을 수 있었어요. 사업초기 믿었던 우리의 동업자 역시 필리핀을 떠난 것이 아니며, 이미 그 전부터 도박판에서 상당한 돈을 잃고 지금도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것도 듣게 됐지요. 


결국 매장공사가 지연된 이유에는 한국인 동업자의 도박과 현지인 매니저의 공사대금을 빌미로 가로챈 돈이 밑빠진 독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어요.


집 안에는 아직 어린 둘째가 있었고 그때 정말 전 신변의 위협을 느꼈어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딸아이는 아무도 없는 필리핀이란 낯선 땅에서 고아가 될 수도 있단 생각에 그밤 저는 결심했습니다. 

필리핀을 미련없이 깨끗히 떠나기로. 




다음날 아침 눈뜨자마자 펜과 포스트잇을 찾아 들었어요. 


빨간 싸인펜으로 한장씩 필리핀 현지화 가격을 크게 써서 붙이기 시작했어요. 

가장 비싼 냉장고, 세탁기, TV, 피아노에 가격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난후, 싱크대 상부장을 열고 그릇과 접시들을 모두 꺼내어 식탁위에 늘어놨어요. 같은 방식으로 포스트잇에 가격을 써서 붙였고 이후에는 방마다 돌아다니며 자잘한 소품들을 모아 마당에 내어 놓고, 벽에 걸려 있는 커텐과 옮기기 힘든 책상과 침대에도 가격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였어요. 신발장으로 가 신발들을 모두 꺼내고, 창고에서는 매장 오픈할때 쓰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공구며 나무, 주방집기를 꺼내어 모두 마당에 늘어 놓았어요. 빨래를 말리기 위해 가져왔던 행거를 마당 한가운데 놓고 옷장에 있던 옷을 죄다 꺼내어 행거에 걸었습니다.  


필리핀에서 했던 garage sale 사진은 물건 파는데 열중한 새 구경온 현지인에게 신형 휴대폰을 도둑맞아 모두 사라진 관계로 구글이미지로 대체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매장에서 썼던, 현지에서 오픈하면 쓸일이 있을까 싶어 가져온 블랙보드 입간판을 눕히고 형광보드펜으로 'GARAGE SALE'을 꾹꾹 눌러 썼습니다. 마당입구에 간판을 세우고 가방들 틈에서 천으로 된 크로스백을 꺼내 둘러메고 거슬러줄 필리핀 현지화를 지갑에서 꺼내어 모두 채워 넣었습니다. 

정확히 한국에서 보름이 걸린 이삿짐이 도착한 지 일주일만의 일이었습니다. 


게라지 세일이 시작되었어요.

타운내 옆집 한국인들이 안타까워하며 조금씩 사기도 했고, 평소 한국제품을 들여오려다 배송비 때문에 주저하던 그들의 지인들이 와서 사기도 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가장 큰 고객은 예상외로 가난한 필리핀 현지 서민들이었어요. 

타운내 한국인 주인집에서 아이를 봐주고 빨래를 해주고 기사를 하고, 타운내 공사장에서 집을 짓고 있던 가난한 그들이 가장 큰 고객이 되었습니다. 내리쬐는 한낮의 도로를 신발도 안신고 벗은 발로 다니던 공사장의 인부들, 주인집 아기를 품에 안은 가정부들, 주인의 차를 몰고 정원을 손질하던 꾸야들이 에누리도 없이 번 돈을 털어 물건들을 사 갔습니다. 

오히려 이 물건 저 물건 집었다 놨다하며 깍아달라 줄기차게 요구하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었어요. 


잘 사는 부자 친척이 있다는 옆집 꾸야는 친척을 불렀습니다. 부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꾀죄죄한 몰골로 전대를 메고 온 친척여자는 오자마자 그 비싼 전자제품들을 에누리도 없이 메고 있던 가방의 지퍼를 열고 현금을 세어 통 크게 계산했습니다. 그 친척이 사간 물건들이 가장 많았는데, 마지막 날까지 우리에게 필요했던 세탁기와 냉장고, 식탁은 미리 예약을 하고 마지막날이 되자 소 달구지를 연상케 하는 낡은 트럭에 맨발의 인부들을 가득 싣고 와 모두 순식간에 물건을 실어갔습니다. 필리핀 사람중에선 좀처럼 보기힘든 하얀 얼굴의 타운옆 양계장 주인여자는 며느리와 손주까지 데리고 와 값나가는 벽시계와 망사커튼을 거금을 주고 사 가기도 했어요. 


한국에서 국제이사를 할때만 해도 '이게 필리핀에서 필요하겠어?' 하면서도 매장오픈하면 다 아쉬울것 같아 바리바리 싸들고 간 것들이 그곳에선 정말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언니네가 쓰지 않아 가져왔던 오래된 낡은 침대,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남편이 만들었던 탁자와 책꽂이, 중고로 사들였던 주방집기, 새 모델로 교체하면서 주셨던 엄마의 오래된 김치 냉장고까지. 어쩌면 한국에서 처분하기엔 헐값으로도 못 팔았을지 모를 그것들을 한국산이 귀했던 그곳에서 알뜰하게 팔 수 있었습니다. 물건판 돈은 이민가방 제일 밑바닥에 넣고 한국에 돌아와 오피스텔 보증금으로 소중하게 썼네요. 


취미삼아 그렸던 DIY 유화그림,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쓰지 않을 낡은 전자패드, 느려 터지기가 나무늘보만했던 20년된 노트북, 가게오픈때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벽시계,  손때묻은 화장실 청소도구까지 싸그리 알뜰하게 팔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소위 말하는 '명품'과 책이었습니다. 


오래되긴 했지만 진짜였던 샤O, 구O 핸드백, 페라OO 하이힐과 샌들, 그밖에 명품까진 아니었어도 제법 돈을 주고 구입했던 메이커 정장옷들, 천연 가죽으로 만든 서류가방은 그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았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던 티셔츠와 신고 있던 운동화까지 탐내하던 그들이었지만, 명품은 그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다니는 그들에게 발O, 페라OO 구두가 무슨 소용이겠으며, 치장한다고 해봐야 얼굴에 화장하고 귀걸이 한채 집안 일하고 애보는 그들에게 샤O백과 아르마O 정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또한 한국책이야 한글을 읽을 수 없는 그들에게 당연히 의미 없었겠지만, 아이를 위해 가져간 영어동화책도 모두 외면받았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많아 활자가 큰 영어책은 환영받을 줄 았았지만 나중엔 거저 준다는 소리에도 책은 거들떠도 안보더군요. 그들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낙후된 국민성의 원인을 알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GARAGE SALE을 한지 정확히 열흘 후, 내놓은 물건들을 거의 처분하고 남은 자잘한 것들은 옆집 꾸야에게 선물삼아 알아서 처분해줄 것을 부탁한 후, 아직은 한겨울일 한국에서 입을 겨울옷과 책들을 두개의 이민가방에 담고 노트북 두개를 챙겨 들었습니다. 

야밤도주하듯, 혹시라도 매니저와 그의 일당들이 공항가는 길을 막을까 불안해하며 렌트카를 가질러 온 업체에 공항까지 태워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클락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길, 어두운 밤거리에 달이 휘영했습니다. 차에서 내다보는 필리핀 클락의 밤거리는 더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와보였습니다. 


두달전, 아이와 함께 도착했던 필리핀 밤거리가 떠올랐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SM몰의 매장을 보고 투자를 결정하기 위해 처음 왔던 한여름의 클락도 생각났습니다. 그 여름, 2박 3일의 짧은 일정속에 만났던 매니저와 직원들, 당시만 해도 화기애애함 속에  제게 '보스'로 깍듯이 부르던 그들에게 주었던 신뢰와 정을 떠올리며 씁쓸함을 떨칠수 없었죠. 그 일정이후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마지막 투자를 위해 집을 처분했고 필리핀으로의 이사를 위해 국제이사업체와도 계약을 체결했었더랬죠.  


부푼 꿈을 안고 편안히 지내려 온 필리핀에서 지은 죄도 없이 피해자여야 할 우리가 오히려 가해자가 되어 그 밤 도망치듯 클락을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갈비뼈가 앙상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한 남편과 아직 어린 둘째를 데리고, 당장 한국에 도착해 돌아갈 집도, 직장도 없는 빚쟁이의 신세로 빈털털이가 되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고 있었습니다. 젋지도 않은 나이, 사십대 중반에 말이죠. 


이미 마음의 정리를 했음에도 생각할수록 제 신세가 기막혔습니다. 눈물은 이미 사업이 사기였단 걸 인정한 이후 필리핀의 불타는 저녁 노을길에 주저앉아 충분히 흘렸기에 더이상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하여 무사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기만을, 그것만을 바라고 또 바랬습니다. 


밤의 클락 공항 _구글 이미지


다행히 그 밤 저희들은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고, 다른 관광객들에 섞여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칠흑같은 밤을 지나 여명이 밝아올 때 한국땅에 도착했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 당장 갈 곳이 없어 시아주버님댁에 몇주를 얹혀 지냈고 이후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 나오면서 작은 아이를 언니 집에 맡겼습니다. 지하철에서 김밥집을 시작했고 오전 5시에 출근하여 밤 10시까지 남편과 함께 매장을 지켰습니다. 입점했던 지하철 매장 매출이 안 나와 한달만에 오피스텔을 빼고 그 전에 살던 동네에 작은 아파트를 얻어 다시 이사를 했고 좀더 번화한 지하철 매장에서 다시 같은 브랜드로 김밥을 팔았습니다. 일년 후에야 작은 아이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고 기숙사에 있던 큰 애가 자취방을 얻어 나오면서 비용을 조금은 대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년, 또 이런저런 일들로 도시의 삶을 버티고 버티다 돌아오고 싶었던 제주로 다시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가족들은 이곳, 제주에서 참으로 조용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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