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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Jul 02. 2020

섬섬옥수는 필요없어요

제주살이를 꿈꾸는 당신과 나누싶은 이야기

제주에 살고 있는 후룩쥔장 입니다.


저는 요즘 파트타임으로 #펜션청소 일을 하고 있어요. 

하루에 서너시간 정도이고, 그것도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11시부터 3시까지이기에 저같은 주부가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일입니다. 또 입실이 매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일주일에 삼사일 정도만 하기에 충분한 수입은 아니지만 부업으로 생각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어차피 저는 제가 주력으로 하는 일이 따로 있어서 매일 하는 일이 어렵기도 하구요. 


침구류 등의 빨래는 전문 세탁업체가 있어 맡겼다 찾아오기만 하면 되고, 그야말로 청소와 정리 업무만 집중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예요. 주부들이야 밥하고 청소하는 일이 몸에 베어 있어 그리 낯설지 않고 저 같은 경우 잦은 이사로 정리만큼은 자신있는 분야라 제 적성에 맞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친구가 우스갯소리로 저를 지칭해 #조직부적응자 라 할만큼 조직생활만 했다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라 서너시간 동안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하는 이 일이 저에겐 꽤 맞습니다. 물론 매번 침구커버를 벗기고 다시 씌우는 일이 만만치 않고 일의 강도가 세긴 하지만 시간이 짧고 나름 페이도 좋은 편이라 만족하며 다니고 있어요. 건강을 위해 헬스장 끊었다 생각하면 오히려 돈 버는 운동을 하고 있다 생각도 듭니다. 


처음에 알바삼아 이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초등학생인 작은 아이는 걱정을 했어요. 

"엄마, 그 일 힘들지 않아?"

"할 만해. 시간이 짧아서 괜찮아. 안 힘든 일이 어딨겠어? 엄만 괜찮아."

그럼에도 아이는 일 있는 날이면 부지런히 일을 끝내놓고 학교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제게 매번 걱정스럽게 묻습니다.

"오늘도 일 갔다 왔어? 많이 힘들지?"


제주에 와서 펜션청소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소소한 알바들을 했었어요.

호텔 조식 서빙과 요리, 골프장 레스토랑의 찬모, 소품샵 판매등 짧게 짧게 파트타임을 했었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농수산유통 은 #제철재료 를 중심으로 판매하는 일이라 늦은 봄부터 추석이 오기 전까지 판매할 아이템이 마땅치 않아요. 농사로 따지면 농한기처럼 요 삼사개월이 저희집에선 보릿고개나 다름없지요. 사지 멀쩡한 어른이 그렇다고 집에서 놀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이렇게 잠깐씩 알바를 구하게 됩니다. 

육지에서 회사다닐 땐 사실 엄두가 안 났던 일이긴 해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잖아요. 
사회적으로 가지는 편협한 시선들, 나 스스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직업에 대한 선입견. 
어차피 돈 벌자고 하는 일에 천하고 귀한 일은 없으며 편하고 존경받기만 하는 일은 없는데도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주살이를 통해 일에 대한 정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십대인 저희 세대만 해도 어쨌든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어느 정도 취업이 보장되던 세대잖아요. 

화이트 칼라와 블루칼라 사이에서 막연한 자긍심 같은 것도 있었던 거 같구요. 저는 비록 그 자긍심의 세계를 일치감치 끝낸 사람이긴 합니다만, 정장 입고 구두 신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하던 직장인에서 좁은 주방에서 하루종일 지지고 볶으며 땀 흘리는 시간이 처음엔 많이 서럽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선택한 일이었고, 제가 좋아했던 일이었고, 또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에 어느덧 그 생활도 십년이 넘었네요.


도시와 빌딩과 오피스생활_unsplash



나이가 들면 육지생활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제주살이 에선 남들 보기에 번듯한 사무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번듯한' 이란 것도 막상 해 보면 상사 눈치 보고, 실적에 쪼이고, 고객에게 시달리는 그저그런 별볼일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육지생활에선 복잡한 출퇴근의 피곤함까지 더해지지요. 


제주의 일자리는 출퇴근은 여유로운 편이나 상대적으로 적은 페이와 한정된 일자리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의 범위는 주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노동'을 필요로 합니다. 



큰 제조업이 없이 관광업에 의존해야 하는 제주인 만큼 일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곳은 호텔이나 골프장, 식당이나 카페, 여행사나 렌트카 업체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는 일들은 서빙이나 요리, 청소나 시설관리등의 노동 일이죠. '예전에 어떤 직장에 근무했으며, 무슨 일을 했는지'는 사실 의미없는 일이지만, 알고 보면 대기업이나 공기업에서 꽤 높은 지위까지 근무하셨던 분들이 제주에 많습니다. 그분들 역시 농사를 짓거나, 식당이나 카페를 하거나, 골프장이나 호텔에서 짐을 운반하고 현관정리를 합니다. 


제주살이를 통해 '노동의 가치' 에 대해 다시한번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읽었던 톨스토이의 '바보이반'이 떠오릅니다. 


욕심과 야심이 많았던 형들과는 달리 노동을 통해 욕심없는 생활을 실천했던 이반에게 주어진 행운들. 그 행운들에도 자만하지 않고 주변과 나누며 여전히 노동을 하는 이반에게 악마 대장은 온갖 유혹을 해요.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배가 고파 이반의 여동생이 주는 무료급식을 먹으러 가지요. 노동도 하지 않고 단지 얻어먹기 위해 오는 이들이 못마땅했던 여동생은 손을 먼저 보여줄 것을 요구합니다. 손에 굳은 살이 배어 있지 않으면 노동하지 않은 자이고, 그런 자들은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입으로만 나불댔지 노동을 해본적 없는 악마대장은 그 고운 손이 걸려 밥도 얻어먹지 못하지요.





손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 많은 제주살이_unsplash


제주살이는 어찌보면 일차원적인 일들의 연속입니다. 

도시생활처럼 머리를 굴려 기획을 하고 마케팅을 하고 사람들을 현옥시켜 영업을 해야 하는 일과는 그 결이 조금 다릅니다.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그 수확물을 시장에서 팔거나,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거나, 집을 짓고 인테리어를 합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아도 집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낡은 곳을 수리하지요. 텃밭에서 자란 상추를 따고 나물을 말리고 물고기들을 손질해요. 


여자든 남자든 그 모든 일엔 사실 머리보단 '손'이 앞섭니다. 그래서 손재주 있는 사람들이 살기에 훨씬 유리한 곳이기도 합니다. 게으를 틈 없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살수 있는 곳입니다. 예쁘고 고운 손은 오히려 게으름의 상징이 될수 있는 곳이죠. 


저는 원래 못생긴 손을 가졌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짧고 손등에는 힘줄이 드러나고 마디가 굵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릴 땐 이 손이 정말 컴플렉스였습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교과서에서 이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섬섬옥수(纖纖玉手)


섬섬옥수_구글이미지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하얀 손. 

듣기만 해도 정말 고운 자태가 연상되는 그 단어를 배우고 제 손을 다시 바라봤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제 손은 섬섬옥수와는 거리가 멀었죠. 그 손이 여자로선 치명적인 결함이라 생각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씻기고 기저귀 갈고, 이유식해 먹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사노동, 육아노동에서 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 두 손으로 할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았었나?' 새삼 놀라며 그 손으로 아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빨고 설겆이를 하고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되더군요. 노동에 적합한 손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서요. 정말 섬섬옥수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면 전 그렇게까지 거침없이 일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제 예쁘고 고운 손이 너무도 아까워 매번 물에 젖을까 조바심내며 장갑을 찾고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았을 것 같습니다. 


제 손은 지금도 여전히 반지나 팔찌, 그 흔한 매니큐어나 손톱 손질 한번 받아본 적 없는 거친 손입니다. 장갑이 없어도 맨 손으로 눈에 보이는 잡초를 뽑고, 재료를 다듬어 김치를 담그고, 이불을 빨고, 운전대를 잡고, 택배박스를 포장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피아노를 치고 지금처럼 노트북을 열고 자판을 두드리며 쓰고 싶은 글을 씁니다. 


굳은 살이 배기고 뭉특해지고 마디가 굵어진 제 손이 이제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적어도 정직하게는 살고 있다는 증거물 같아서요. 

제주살이에선 섬섬옥수가 필요 없지요. 그리고 그런 제주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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