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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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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Nov 17. 2020

제주의 아침은 밤보다 아름답다

제주살이를 꿈꾸는 당신과 나누고싶은 이야기


전 원래 아침형 인간입니다.

놀기 좋아하고 모임의 껀수도 많았던 이십대엔 밤을 새기도 하고, 먼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둘러앉아 술을 마시기도 했었지만 사실 아침이 더 활기차고 에너지가 솟아나는 인간이지요.



그러나 도시에선 밤이 참 아름답긴 합니다.

늦도록 밝은 가로등, 아파트 사이 사이로 꺼지지 않는 불빛들, 야식 먹기 좋은 즐비한 배달 메뉴.

한낮의 분주함이 사라지고 모든 가족이 잠든 그 고요의 시간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허락된 시간이기에 더 특별합니다.


하지만 제주의 밤은 다릅니다.

특히 제가 살고 있는 중산간은 해가 더 빨리 지기 때문에 밤이 무척 긴 편인데요.

생각 같아선 산장같은 집에 이 긴긴밤 콕 박혀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사색도 하고 참 낭만적이고 운치있는 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참 다르게 와 닿습니다.



대부분의 농촌생활이 그렇듯 해가 지면 모든 생활 또한 그에 맞춰 돌아갑니다.

일찍 해가 지는 만큼 저녁밥도 일찍 먹고 잠도 일찍 잡니다. 해안가보다 평균 1~2도는 낮은 기온 때문에 해가 지면 더더욱 외부와 차단할 준비를 합니다. 커텐_그것도 암막커텐이어야 합니다_도 꽁꽁 닫고 내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들, 이를테면 난방비 비싼 제주답게 기름 보일러는 무서워 적당히만 데워주고 부실한 온기를 채워줄 석유난로나 화목난로, 온풍기등을 돌려줍니다.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 스멀스멀 잠 기운이 쏟아지지요.



영화도 책도 늦게까지 볼수 있는 동기가 생길 환경이 안됩니다.

그리고 늦게까지 있어봐야 저처럼 태생적으로 비관적인 자아들은 그 밤이 몹시도 괴롭습니다.

모처럼 든 낮잠으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던 지난밤, 참으로 오랜만에 책도 보고 밀렸던 일들도 계획해보리라 다짐했건만 결국 이런 저런 생각들로 오히려 번민만 깊어졌습니다. 오롯이 집중하여 책을 보지도 못하고, 미뤘던 일들을 계획하기도 전에 '내 인생이 이대로 굴러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구심부터 '왜 모든 일엔 전략이 필요하단 걸까? 전략 따위 없이 그냥 살면 실패한 인생일까?'란 생각이 꼬리를 물더니 그동안 애써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했던 주변 사람들의 근황까지 하릴없이 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했어요. 그 번민의 끝은 '결국 나는 회생불가능한 실패한 인생'이라는 극단의 결론을 내린뒤 깊은 우울감에 빠져버렸습니다.



혼자 깨어있는 야밤에 저의 생각을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척도는 의식의 흐름대로 입력하는 '검색어'입니다.

딱히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의문들에 그 어딘가에는 그럼에도 조금이나마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 밤, 본능적으로 자판에 입력하는 검색어는 대략 이런 어휘들의 조합입니다.

'전략없이 사는 방법', '우울증의 초기증상', '하고싶은 대로 살기' '성공한 인생', '한국에서 여자로 살기'등등 참으로 맥락없고 의미없고 답을 주기도 곤란한 애매한 단어들의 나열이지요. 평소 몹시도 현실적이며 지나치게 냉정하다 싶을 만큼 이성적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행동들입니다. 아마도 '밤'이란 요물이 빚어내는 또 다른 저의 모습이겠지요.



예전엔 저의 이런 무대책의 의식의 흐름을 쫓는 방심한 모습이 꽤나 낭만적으로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이었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낯 부끄러운 감정의 찌꺼기들을 대방출했던 밤의 낙서들. 언젠가부터 그 또한 스스로 낯간지러워 술이란 도구에 의지하며 하릴없이 홀짝이다 훌쩍이며 잠든 밤들이 이어졌습니다. 다시 그 밤들은 다음 날을 위한 성실한 잠의 시간으로 대체되었구요. 그렇게 흘러 제주에서의 밤은 대체적으로 충실한 잠의 세계였습니다.



제주살이 이제 오년차.

전 아직도 문득문득 제주가 주는 풍경에 여전히 감탄사를 내뱉고 가슴이 뻐근해질 정도로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매번 같은 장소에서 보는 풍경인데도 매번 또 그렇게 감탄을 합니다.


오늘처럼 햇살좋은 아침 풍경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제주의 얼굴입니다.

푸른 나무들 사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맞으며 달리는 아침 드라이브 길은 '이대로 죽어도 좋아'를 외치게 만드는 단골 포인트입니다.


오늘 아침 라디오 클래식 채널에선 흔치 않게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오는 길 저는 부서지듯 눈부신 햇살에 넋을 놓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음악, 이 햇살, 이 온도, 이 풍경




더이상 바랄게 없이 좋았습니다.

지난밤, 이 나이 되도록 가진 것 없고 불안한 이 인생이 한 없이 초라하고 애잔해 속이 쓰리던 것도,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와 경계심에 울분이 쌓이던 것도,

당장 다음 달의 생계를 걱정하고 또 다음 해를 걱정하며 목이 조여오던 것도

일순간에 봄눈 녹듯 그렇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어찌됐든 저는 이곳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오롯이 느끼며,

지금 당장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저를 평화롭게 하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하고, 욕심을 내려놓게 하는 제주의 아침

그래서 제주의 아침은 밤보다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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