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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Mar 18. 2016

누구에게나 영리한 아이였다..

어느 고3 학부모의 회상..

학교마다 총회시즌이다.

워킹맘의 핑곗거리가 없어진 지금 그동안 하지 않았던 아이들 학교활동 참여에 서툰 발을 들이밀어 본다.

역시 안하던 짓을 해서인가?

가게 두세개를 관리하며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때도 걸리지 않던 몸살을 꺼이꺼이 앓았다.


어제는 이제 고3이 된 큰 아이의 학교 총회가 있어 저녁에 학교를 다녀왔다.

입학하고 나서 처음 찾는 학교.

입학식때도 가지 않았던, 이렇게 무심한 엄마가 또 있나 싶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 역시 초기 몇번의 학교행사 참여를 타진해본 이후로는 당연하게 참석여부를 묻지 않았다.

지난 겨울과 올 봄을 기점으로 정리된 가게와 여러 일들 덕분에 올 한해는 어찌 이제 초등학교를 입학한 작은 아이와 고3이 된 큰 아이의 뒷바라지에 충실해 보리라 다짐한 터.

여직 엄마들의 대학입시와 관련한 정보에 대해 입에 침튀기며 토론할때 무심했던 이 엄마도 이제 더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다싶어 그 입시요강이란 것이 무엇인지, 내 딸은 과연 이 나라의 어느 대학에 고개를 디밀어 볼수 있을지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해 보리라 두 주먹을 불끈!

약 3시간동안의 학교설명과 쌤들 소개, 임원선출등을 거쳐 올해 입시정책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 각 반으로 흩어져 담임쌤에게 건네받은 딸아이의 성적표.

이후 담임쌤의 성적에 따른 지원대학에 관한 경험자료를 또 브리핑받고 든 생각은..


흠...

유형이니, 등급이니, 요강이니 등에 관한 세세한 내용은 정확히 다 숙지하지 못하겠다 하더라도,

내 두손에 쥐어진 성적이 대충 쑤시고 지원해볼수 있는 학교의 레벨이란 것이 대략 그려지더라는...

아...

생각보다 현실은 가혹하여,

우리 세대는 워낙 인구가 많고 학교가 한정되어 치열했던 대입이

인구가 줄고 학교가 많아진 지금이라고 달라질 것이 없더라는..

그때는 대학을 가겠다는 인원이 어느정도는 한정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너도나도 다 대학을 가야겠다는 것이니 인구가 별로 줄지 않은데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하는 대학수준은 비슷하여

실질적으로 이름없는 대학을 제외한 나머지 대학에 대한 지원자들은 큰 변화가 없다는데 그 원인이 있었다.


평소에도 대학이란 것이 지금의 학교생활에 최종목표가 될수 없으며

끝인것만 같은 그 대학에 들어가봐야 또 다른 시작일뿐이고

미래의 직업과 생활에 대학졸업장이란 큰 의미가 없으니

입시에 구애받지 말고 원하는 것을 찾도록 하라는 것이 나와 남편의 지론이었으나,

막상 받아든 성적표와 입시내용을 보니 사실 조금 난감함과 한숨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아이가 대학을 원치 않았거나 다른 분명한 지향점이 있었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문제이나,

지금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 아이는 지극히 평범한 인문계의 이과학생일뿐이었으니.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줄곧 '대학입학' 이며,

아이들과의 대화도 대학에 관한 내용이니 어떻게 그 환경에서 초연할 수 있을까?


이미 내가 지나왔던 길들이라 인생의 경험자로서 많은 이야기를 아이에게 전해주고

앞으로 아이가 지나가야 할 시행착오의 그 길을 조금 단축시켜주고 싶은 이 엄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고, 이런저런 방향들을 제시해 보지만,

참, 부모와 자식간의 이런 이야기들이 쉽지 않다는 푸념을 해본다.


그 전날 다녀왔던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총회가 생각났다.

윤기나는 까만 머리와 탱탱한 피부, 아이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빛나는 반짝이는 눈빛들에 반해

염색해도 감출수 없는 힘없는 머릿결과 희끗거리는 흰머리, 탄력을 잃은 피부와 아이에 대한 체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눈빛, 인생의 무게에 기울어져가는 어깨...

참석한 부모들의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하루만에 뛰어넘는 타임리프의 경험을 했다.


가만 앉아 담임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파노라마처럼 지난날의 큰 아이의 성장과정이 떠오른다.

분명 큰아이도 지금의 작은아이처럼 작었던 유치원 시절이 있었고,

꿈많았던 초등학교 시절이 있었고, 무엇이든 잘할거라며 예체능 학원과 학교공부에도 소홀하지 않기 위해 보냈던 수학, 영어 학원의 시절을 거쳐

삐딱한 눈빛과 앙다문 입술사이로 대화하기 힘들었던 사춘기 중학교 시절이 있었다.

지난 그 시절동안 모든 엄마들에게는 '내 자녀가 최고'라는 자부심의 시간이 있었고,

이런 저런 배움의 기회를 주고 옆에서 지켜보며 흐뭇했던 미래를 향한 행복한 희망의 시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아이를 향한 열린 마음,따뜻한 시선, 빛나는 희망의 시간들이 존재했었는데

어쩌다보니 지금 이 교실의 부모들은 회한의 한숨을 내쉬며 이 공간에 모여있게 되었는지...


그 빛나던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생이 되면서 급격히 우열이 가려지게 되었고,

부모와의 대화와 이해보다는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서운함을 켜켜히 안은채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회로 내보내야 하는 시기는 가까워 오는데 아이도 부모도 실은 그 누구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서로는 당황스러워하고 있는건 아닌지...


얕게 내뱉는 그 한숨이 어찌보면 꼭 대학을 가고 못가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넓은 세계로 날려보내야 하는 품안의 새를 아직은 미더워 품는 미련과 걱정의 한숨은 아니었을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헤르만 헤세-


알을 깨는 아픔은

아이와 부모 모두 겪어야만 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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