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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Apr 19. 2016

발효의 시간_다시 두번째

후룩쥔장의 창업 그 두번째 이야기_1

제주 가게를 팔고 올라온 이후 또다시 시작된 삶.

많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언제나 나를 이끄는 힘, 그것은

'너가 뭐 가진게 있었다고. 어차피 인생 빈손 아닌가? 더 잃을 것도 없다. 도전!'이란 내면의 소리.

조금은 지난 나와 그의 이야기, 그래서 이건 '우리의 이야기'.

가진 걸 버렸더니 오히려 기대이상의 더 많은 것을 갖게 된 이야기..


#1.

고기고로께의 시작



큰아이 학교문제로 다시 예전에 살던 경기도 그 동네로 이사를 왔다.

제주에 뼈를 묻겠다며 함께 올라가자던 나의 제안에 두달 동안의 침묵과 동굴생활로 그 대답을 대신했던 남편.

남편을 혼자 두고 나와 딸들은 공항에서 작별을 했다. 영원한 헤어짐도 아닌데 마치 아주 오랜 시간 이별을 앞둔 사람들처럼 짠한 마음이 밀물처럼 쓰리게 가슴을 적시던 공항의 아침..

이제는 내가 두 아이를 책임진 가장이요, 보호자며 일과 가정 모두를 해내야 할 책임자임에 자꾸만 기울어지려는 어깨를 더욱더 곧추세웠다. 제주에서처럼 힘들면 누구탓을 하며 술에 취해 원망할 사람도, 술마실 일도,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다며 잠든 둘째아이를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치 잔다르크의 마음이었달까?


 이삿짐을 전날 제주에서 배로 보내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도착한 옛 동네. 며칠전 내렸던 눈이 채 녹지 않아 미끄럽던 아직은 찬 2월의 겨울이었다. 추위속에 두 아이를 같은 동 큰아이 친구집에 맡겨놓고 도착한 이삿짐차를 맞았다. 도대체 몇번의 이사인지.. 이젠 뭐 이사란 이름이 주는 부담이나 무게, 돈계산도 그저 당연히 지나가는 과정처럼 그렇게 스스럼없이 해치우는 이사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고나 할까?

2년전 제주로 내려갈 때 그 아파트에서 이삿짐을 싸주던 분들이셨고 제주에서도 두번이나 이삿짐을 싸주셨고, 그러니 우리집 가구며 세간까지 다 꿰는 분들이셨음에 이제는 반가운 마음까지..

이삿짐을 대충 쌓아둔 채 필요한 몇가지 물품들을 사러 나간 김에 동네를 몇 바퀴 돌았다.

당장 필요한 건 가게였다. 제주에서 받은 권리금으로 올라와 월세보증금 내고 이사비용 대고 큰아이 고등학교 입학비며 작은아이 유치원 등록비며 나갈 돈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식이면 두달이면 가진 돈을 고스란히 쓰고 빈털털이가 되어야 할 판이었다. 집도 전세가 아닌 월세였다. 제주와 다르게 한번에 선불로 내는 년세가 아닌 이상 당장 다음달이면 돌아올 월세부터 막아야했다. 무엇보다 당장 수입을 낼 수 있는 가게를 찾는 것이 시급했다.


그렇게 이사 보름만에 동네 가까운 곳에 작은 가게를 얻었다. 큰아이 고등학교 입학준비하면서, 작은 아이 유치원 등록 수속하면서 가게 오픈 준비를 했다.

끝낼 각오까지 하고 왔던 남편이었지만 가게를 얻었다는건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책임은 내가 져야 하겠지만 애들 아빠요, 아직은 남남이란 이름은 아니었으니 가게를 얻었다고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며칠 후에 남편이 가게오픈까지 도와주고 가겠다며 트렁크를 들고 올라왔다. 물론 그 트렁크는 한달동안 베란다 한켠에 열린채로 놓여 있었고, 이후로는 다시 쌀 일 없이 창고에 쳐박히게 되었으며 제주에서 뼈를 묻겠다던 남편은 아직까지 같은 집에서 함께 뼈를 묻을 듯이 살고 있다.  

 

 작은 가게였다.

8평이 될까? 어차피 우리가 할 아이템은 제주 흑돼지로 만든 고로께 전문점었기 때문에 필요한 건 많지 않았다. 반죽할 작은 공간과 한칸짜리 개수대, 튀김기와 냉장고, 고로케를 진열할 매대 정도였다.

제주에서 가게를 하면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음식을 해내 대접하고, 설겆이를 하는 식당이란 것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다. 한여름 더위속에서 불구덩이 같은 주방에서 온몸에 땀을 흘리며 음식을 해야 하고, 홀은 홀대로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냉난방을 해야한다는 것도 심적, 경제적으로 부담이 됐다. 다시 가게를 한다면 서빙할 알바가 필요없이 아주 작은 곳에서, 먹고난 식기를 설겆이할 필요없이 싸들고 갈수 있는 테이크아웃을 하겠다 맘먹었다. 그렇게 고심한 끝에 흑돼지 고기고로케란 아이템이 탄생했다.


 최소한으로 한다면서도 돈이 쑥쑥 빠져나갔다. 주방집기는 황학시장을 돌아 주문했고, 매대는 그나마 힘을 주고 싶어 동네 공방에서 좋은 자재로 맞췄다. 옷가게를 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가스가 들어와 있지 않았다. 도시가스를 끌어다 연결하는게 생각보다 돈이 들었다. 이래저래 항상 그랬듯 예산은 초과되고 있었다.  오픈을 서두르지 않으면 아이들과 생활하는 문제가 쉽지 않아보였다.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보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보름이란 시간동안 내 시계는 분단위로 쪼개져 바쁘게 돌아갔다. 주문한 자동차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섯살되는 작은 딸아이 손을 잡고 30분 거리의 가게까지 걸어다니며,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황학시장을 몇바퀴 돌고, 집정리를 하고, 아이들 입학준비를 시키고...

지금 돌이켜보니 내 생애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이 그때의 한달이 아니었나 싶다.


 따로 메뉴를 테스트하고 준비할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어 오픈 전날 처음 가게에서 남편과 반죽을 하고 튀겨본 후 바로 다음날 오픈을 했다. 물론 그전에 메뉴에 대해 남편과 대략 이야기는 나누었고 레시피 정도는 마음의 결정을 했으나 직접 해본 건 단 3시간 정도? 지금 와 생각해보면 대단한 배짱이오, 무모함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빨리 오픈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간절했으니 맛의 평가와 레시피의 정립은 이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수정해나가면 된다라는 생각이었다. 이후 다른 가게를 오픈할 때도 사실 치밀한 준비끝에 한적은 없다. 신메뉴는 거의 오픈과 함께 개발되었고 손님들에게 바로 선보였으며 반응 후 수정, 확정되거나 사라지거나 폐기되었다. 그래서 우리 가게의 특징은 메뉴판을 크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 제주 아일랜드때부터 우리 가게의 메뉴판은 바로 수정할 수 있는 칠판이거나 끼었다 뺄수 있는 푯말 형식이었다.


 일단 메뉴에 대한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기존에 없던 형태의 고기가 꽉찬 고로케였고 무엇보다 돼지로 만들었지만 제주 흑돼지만의 고소함과 깔끔함으로 고기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부담없이 어필이 됐다. 1500원에서 2000원이라는 가격도 밀가루가 아닌 고기만으로 꽉찬 내용구성에 긍정적이었다.

경기도 변두리 동네, 작은 가게에서 그렇게 다시 두번째의 아이템이 시작되었다.

벚꽃이 피어나는 봄과 함께 우리의 봄은 튀김냄새로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성공의 경험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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