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단상
"너가 무슨 MZ 세대인줄 알아?"
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Z세대를 통칭하는 말이다. 다만 세대를 가르는 기준은 차이가 있는데, 밀레니얼 세대에 대해 1980~1995년 사이 출생한 세대를, Z세대를 1996~2000년 사이 출생한 세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MZ세대는 모바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최신 트렌드와 남과 다른 이색적인 경험을 추구하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MZ세대는 SNS를 기반으로 유통시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비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MZ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소유보다는 공유(렌털이나 중고시장 이용)를, 상품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소비 특징을 보이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나 특별한 메세지를 담은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미닝아웃' 소비를 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 세대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가격보다는 취향을 중시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많아 '플렉스' 문화와 명품 소비가 여느 세대보다 익숙하다는 특징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MZ세대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지금의 MZ 세대전에 X세대가 있었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나는 소위 'X세대'로 불렸다.
당시 X세대는 '압구정 오렌지족', '락카페'로 대표되기도 했고 천리안이나 하이텔을 기반으로 한 통신1세대이기도 했다. 서울 강북에서 오래 살았고 이후 경기도로 이주한 나로선 압구정 갈일도 거의 없었고 오렌지족은 커녕 낑깡족도 본적이 없었으나 통신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천리안을 시작으로 하이텔, 나누우리까지 속도가 빠르다는 통신사는 두루 섭렵해가며 모두가 잠든 으슥한 밤이면 하이에나처럼 전화선을 통한 채팅상대를 물색했다. 지글지글 가래가 끓는듯한 통신접속음을 필두로 먼동이 터오는 새벽까지 얼굴모를 상대와 채팅하느라 두눈은 빨간 토끼눈이 되곤 했다.
당시 통신비는 전화세 고지서에 얹어 나왔는데 채팅이 절정에 이르던 어느날, 20만원이 넘는 전화고지서를 받아든 엄마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그날도 여지없이 지르륵거리며 통신에 접속하는 순간, 한밤중 주무시다 깨어 머리를 산발한채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큰 주방가위를 들고 내 방에 들어온 엄마는 전화선을 싹둑 잘라버리셨다. 그럼에도 채팅을 포기할수 없었던 나는 남자이름을 연상케 하는 본명 대신 예쁘장한 예명으로 타통신사에 신규로 가입하여 통신을 이어갔다. 새로운 이름으로 고지서가 올때쯤이면 우편함을 지키고 있다 잽싸게 수거후 용돈으로 통신비를 충당했다. 가끔 집 전화로 음성을 듣고 싶다는 이들이 있으면 몇번의 거절후 호기심을 참지못하고 알려준 이들도 있었는데 본명과 다른 이름이 다른 가족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전화기 옆을 지키고 있다 받곤 했다.
당시 채팅이 이어진 후엔 번개를 통한 만남이 일상적으로 당시 남친이 없었던 난 마음맞는 이성을 찾기 위해 일주일의 7일동안 매일 다른 이와 약속을 잡기도 했다. 몇개월간의 채팅을 통한 서로의 익숙함은 정작 만났을때 어색함으로 시작됐고 대부분은 실망감으로 이어져 1회성으로 끝났으며 아주 가끔은 지속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했으나 각자의 생활이 바빠지면서 역시나 별 이벤트없이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당시는 아직 휴대폰이 나오기 전으로 삐삐를 필수로 차고 다녔으며 공중전화 박스 앞에는 언제나 자신의 음성사서함을 들으려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요즘은 서로에게 관심좀 있다 싶으면 '번호따기'가 먼저인 것처럼 그때도 관심의 대상에겐 먼저 삐삐번호를 묻는게 수순이었다. 조금 여유있는 자들은 거리의 공중전화에서 줄을 서는 대신 막 붐이 일기 시작한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여진 커피전문점에 여유롭게 앉아 카운터에서 호출한 대상과 연결해주는 수화기를 통해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것 또한 휴대폰의 등장과 함께 추억속으로 금새 사라졌다.
컴퓨터가 가정집마다 막 보급되기 시작한 때로 레포트 제출이나 통신상에서의 채팅을 위해 빠르고 정확한 타자는 압도적 능력자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통신상 채팅을 통한 번개와도 같았던 타자수는 묘기에 가까웠기에 독수리 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던 복학한 선배들에게서 종종 레포트 대행의뢰를 받곤 했다. 종이에 써준 글들을 단순히 컴으로 옮겨준 댓가로 커피나 술, 피자등을 얻어먹었다.
그전까지 물을 돈주고 사먹는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으나 캠퍼스엔 어느새 500원짜리 생수통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 늘어났다. 단순한 플라스틱 통을 들기만 했을 뿐인데도 후광효과는 놀라웠고 나 역시도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거금 500원을 주고 당당히 생수병을 사서 미지근해질 때까지 캠퍼스를 온종일 끼고 다녔다. 잔디밭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앞에 두고 토론을 하거나 민중가요를 부르며 어깨동무를 하던 선배들도 여전히 존재했었으나 우리 X세대들은 맥주는 사치라는 선배들의 눈을 피해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았으며 민중가요 대신 짝사랑의 아픔과 떠나간 이성에 대한 이별을 노래했다. 농악이나 연극이 인기였던 기존 세대의 동아리 활동은 우리 세대에겐 기피대상이었고 대신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TIME이나 AFKN 동아리가 인기였다. 두꺼운 전공서적은 폼나게 끌어안고 캠퍼를 거닐거나 술먹고 집으로 가는 길 전철을 기다릴 때 바닥에 깔고 앉는 용도외엔 거의 들춰보지 않는 소모품이었고 대신 TOEIC 교재는 색색깔의 형광색으로 앞부분 만큼은 곱게도 칠해졌다.
사회이슈에 민감했던 학생회에선 종종 시위나 집회에 동참을 권유하곤 했다. 당시 운동권 선배들에게 나름 이쁨을 받았던 난 단대활동과 총학생회 일을 겸직하고 있었기에 종종 시위활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사상과 이념이란 것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밥 사주고 술 사주고 공강시간마다 놀아주는 선배들의 권유를 사양할순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꽤 큰 시위에 참가했던 어느날, 대열이 흐트러지고 선배들과 헤어져 다른 학교 무리와 뒤섞였던 난 더위와 먼지, 소음으로 몹시 피곤해졌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목욕탕을 다녀온 후 무슨 나들이라도 가는냥 새로 산 샌들을 신고 다시 거리로 나갔지만 이미 시위는 막바지로 거대했던 전열은 와해되었고 거리엔 남겨진 쓰레기와 어수선한 흔적들만 남았다. 허망하게 집으로 되돌아오며 한껏 차리고 나갔던 내 모습에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 길로 조용히 학생회를 탈퇴했다.
당시는 페미니즘이 부각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대학생들을 위주로 한 활동들이 활발했다. 역시 친했던 선배의 권유로 시작한 총여학생회에서 간부를 맡고 있던 난 선배와 함께 대자보를 쓰기도 하고, 소식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미군들에겐 버림받은 한국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 있던 동두천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성의 권익향상에 열심이었던 선배와는 3개월 정도 학교 앞에서 함께 자취를 한적도 있었는데 당시 학생회 활동을 했던 여인들 4명이 한방에서 함께 지냈었다. 가장 막내였던 난 아침 기상과 함께 뿜어대는 선배들의 담배가 마냥 신기했고 선배는 내게도 담배를 권했는데 몇번 피다보니 선배들만큼은 아니었지만 흉내내는 정도는 되었다. 그해 어느 가을, 같은 과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옆자리 남자 동기녀석의 담뱃갑속 담배를 뺴어 입에 문 내게 동기녀석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야, 내가 너한테 불을 붙여줘야 하는 거냐? 너가 이러니까 내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라냐? 너 지금 여자라고 차별하냐? 그냥 불이나 붙여."
"야, 쟤 총여야. 무서운 총여. 대자보 붙이기 전에 얼른 불 붙여줘라."
그들과 함께 그렇게 담배를 피워물고 히히덕거리면 남녀평등이 이뤄지는 줄 알았다. 그런 때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휴학은 군대가려는 남학생들이나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되는 학우들이거나 또는 다니던 대학이 마음에 들지 않아 편입을 생각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남학생이 유달리 많았던 과 특성상 동기들이 모두 군대로 떠나버린 대학 2학년 겨울, 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휴학계를 제출했다. 딱히 어떤 계획은 없었다. 그냥 잠시 쉬고 싶었다. 재수 없이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바로 이어진 대학생활을 2년 하고나니 혼돈스러웠다. 이것저것 해본다고 바쁘게는 살았는데 뭘 위해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혼란스러웠고 자유라는 이름하에 쏟아부은 술과 방종으로 일상이 피곤했다. 1년 정도는 그냥 그대로 잠시 학교를 떠나 있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때만 해도 학기중에 그렇게 목적없이 휴학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다들 의아해했지만 이후 학기중 휴학은 당연한 수순처럼 되었다.
내 윗선배들은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를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는 이들이 많았으나 나는 유럽배낭여행을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 고3시절, 우연히 TV에서 본 대학생들의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커다란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두달간을 그 많은 나라를 여행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그곳이 특히 유럽이란 점이 너무나 낭만적으로 보였다. 대학만 가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갈수 있을 줄 알았다.
유럽행의 꿈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이 문제였다. 그때까지 해외는 커녕 제주도도 나가본 적 없던 나였다. 비행기 값만 해도 그렇게 비싼줄 몰랐다. 거기다 현지 교통비와 체류비까지, 고등학교때 TV에서 봤던 까맣게 그을어 한없이 촌스러워보였던 대학생들은 실은 엄청난 부르조아였던가 싶었다.
휴학기간동안 배낭여행비를 모아보겠다며 이 알바, 저 알바를 기웃거렸다. 결과적으론 집안의 도움으로 복학한 해에 실행할수 있었다. 학교도 관두고 1년동안 헛발질하는 막내딸의 모습이 안스러웠던 엄마는 어릴때부터 내가 그렇게나 갖고 싶어했던 피아노를 사줄 용도로 모아놓은 돈을 내어주셨다.
그렇게 떠났던 45일간의 유럽배낭여행. 어찌보면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아주 커다란 이정표를 만들어준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돈에만 급급했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좀더 충실한 공부와 준비에는 뒷전이었던 아쉬움이 많았던 여행이었지만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난 그 45일간의 추억을 반추하며 살아간다.
졸업후 사회초년생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정보검색에 능했고 엑셀로 복잡한 계산을 할줄 알았으며 파워포인트로 화려한 제안서를 써낼줄 알았던 우리 세대는 그러나 기성 세대들에겐 다르게 읽혔다.
'가장 개인주의적인 세대', '가장 이기적인 세대', '당돌한 세대', '다른 이의 시선은 의식하지 않는 세대'.
광고계에서 발굴했던 X세대의 표본, 이병헌과 이정재가 나와 했던 광고의 카피도 그런 식이었다.
'난 누구랑 닮았단 소린 듣기 싫다. 난 나니까', 이성보단 느낌, 나만의 X세대' 뭐 대략 이런 워딩.
대학 다닐땐 선배들에게 줄곧 들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신입사원이 되었을때도 줄곧 들었다.
"70년대생들은 달라.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거침이 없어. 자기만 알아, 당돌해."
세대를 나누는 기준은 저마다 제각각이겠으나 글쎄다.
그때의 신세대였던 X세대들은 이제 4~50대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다. 사회에서와 가정에서 '꼰대' 소리를 들으며 젊은 세대들의 요즘말을 알아듣지 못하며, 새로운 기기앞에서 두려움으로 움추러든다. 부동산이 힘이란건 알면서도 내 힘으로 내 집한칸 마련하고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버렸으며 주식과 코인에서도 여전히 헛발질이다. 정치 뉴스만 들으면 부화가 치밀어 쌍욕을 해대고, 살아온 지난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다는 사실에 위안보단 슬픔과 걱정이 먼저 밀려든다.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멋진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앞장선 세대로 기억될줄 알았던 우리 X세대는 그러나 이제 뒷방으로 밀려나 그럼에도 조금은 쿨한 꼰대가 되어보고자 애쓰고 있다. 요즘 것들의 오락과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중이다.
그러니, 젊은 MZ들이여.
그대들의 세대 또한 그 유효기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기억하기를. 그대들의 빛남이 세대의 혜택으로 인한 우월함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가장 화려한 한때, 젊음 때문임을.
이마저도 꼰대같은 소리라면 나 조용히 이만 입을 다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