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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Aug 19. 2016

W의 맥락읽기

만화속 세상을 빌려 들여다보는 우리의 자화상

요즘 우리집은 W다.

남편과 나는 단연코 '청춘시대'에 엄지척을 하지만, 아무래도 19금 내용이 많아 두 딸아이까지 가세하면 기세는 W쪽으로 기운다. 드라마를 통해 유행어가 되다시피한 '맥락도 없이'의 의미를 8살짜리 막내딸이 이해하는건진 내 알바 아니고, 드라마가 시작되면 딸과 나는 각자의  생각속에서 드라마에 빠져든다.


 사실 개인적 취향으론 내 코드는 아니다. 나는 그 흔한 웹툰도 본 게 없다.

학창시절 교복치마를 갈라 삔을 꽂고 담을 넘어 학교앞 만화가게로 달려가 순정만화에 빠져든 적은 있지만 현실과 만화를 구분 못하고 순정만화 주인공에 꽂혀 눈물 흘리던 친구를 이해하진 못했던 지극히도 현실파다. 그때부터 백마탄 왕자따윈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탓일까? 그 덕에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백마는 커녕 당나귀도 없이 나타난 소시민으로 자신이 왕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는 나 못지 않은 현실파 남자사람이다.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산으로 가는 듯해 이것이 어쩔라고 이러나 싶다가도 끝나기 10분을 남겨두고 벌어지는 반전에 나와 딸들은 또다시 다음회 예고편을 침 흘리며 본다. 주인공 강철의 끊임없는 서술형 독백과 회상씬의 조합으로 슬슬 짜증이 밀려올 즈음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반전으로 허를 찌르는 이 드라마. 작가의 영리함인건가? 여튼 상상력은 정말 최고라고 인정한다.

 처음 만화속 세상이라는 설정 자체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요즘 애들 말로 '만찢남'이 현실을 누비며 현실세계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큰 줄거리가 나이 사십먹은 이 아짐으로썬 피식 웃음을 물게 만들었다.

기대치 않았던 드라마는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어라?

만화 속 얘기가 만화 속 얘기로만 보이지 않더라는 아이러니. 주인공의 시점에서 등장인물의 목적의식이 사라지면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설정값. 맥락도 없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반전들이 그리 맥락이 없어보이진 않더라는 작가의 깊은 의도.


 사는거 자체가 연극이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 무대의 주인공은 나여야 하고, 등장인물은 나와 관계있는 자들이 된다. 그 관계가 애증의 관계가 됐든, 어떤 목적에 의한 계산적 관계가 됐든,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됐든 일단은 주인공과 연관이 있어야만 등장할수 있다. 한번 등장했다고 해서 그 배우의 존재가 안심할수 있는 자리냐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환경적 변화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는 변화된다.

초등학교 동창에서 중학교 동창으로, 다시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동료로.

엄마, 아빠에서 형제 중심으로, 친구중심으로, 다시 배우자와 자녀 중심으로.

사랑의 감정에서 시작되어 온 우주가 될 것만 같았던 이성도 사람에 따라서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그 존재는 내 마음속에서는 '사랑하는 이의 자리'일지언정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형태가 여러번 바뀔수 있다.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설정값'이라는 걸까?


'이렇게는 살지 않겠어! 나는 다른 삶을 살테야!'라며 꿈꾸는 세계가 훗날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사는 세상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만 같았던 이야기들이 역시나 바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 희극을 상영하기도 하고 비극을 상영하기도 한다. 행복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기도 했다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더라.

살다보면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누군가 내 삶을 좌지우지하며 만들어놓은 스토리에 나는 그저 힘없이 휘말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누구나는 한번쯤 가진 적 있을 것이다. W의 강철처럼 그렇게 '맥락도 없이' 휘둘리는 듯한 느낌. 뜬금없는 곳에서 사고가 나고, 뜬금없던 사람이 갑자기 내게 악의를 품고, 기쁨에 도취된 순간에 뜬끔없이 일어나는 나쁜 일, 뜬금없는 이별과 만남등.


 다만, W의 만화속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현실세계의 우리는 오로지 한가지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주인공들은 아니라는 것. '어떻게 살면서 한가지 목적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는가, 우리도 인간인데..'라는 강철의 대사는 무심했던 내 마음에 돌을 던졌다.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한가지만을 위해 태어났겠는가? 우리 사피엔스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마음과 내면을 가졌다. 각자의 마음 속에는 수만가지 생각들이 있고 수만가지 하고싶은 일들이 있다.

그래서 사는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참 많은 번민을 한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건지, 저 사람을 계속 내 주변에 등장시켜야 하는 건지..

맥락도 없는 설정에 맥락을 찾아 혼자 깨달음을 얻었다며 손뼉치고 있는 나처럼.

주인공의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비쥬얼을 보는 재미는 덤.

회를 거듭할수록 만화속 세상이 시사하는 바가 얕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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