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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Oct 04. 2016

큰아이 대입 면접보던 날

나는 내 딸이 대학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큰 딸아이는 지난 달 내내 수시원서와 자소서에 매달려 있었다.

워낙 무심한 엄마인데다 지금의 교육 구조에 대해 불만이 많은 나로서는 전적으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쪽을 택했다. 고등학교 입시 위주의 교육과 돈벌이에만 혈안이 돼 있는 대학구조에 할말 많은 엄마와는 달리, 대학의 낭만과 당위성에 세뇌(?)되어 버린 평범한 내 딸은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고 싶어했다. 애초부터 이 시대, 이 나라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학생의 틀에 아이를 끼워맞출 생각이 없었던 이 엄마는 그러나 뒤늦게나마 슬그머니 학교 총회니 담임과의 면담이니 등에 한 발을 얹고 염탐하듯 내 아이가 갈수 있는 대학과 전략에 대해 탐색을 시작했다.


조금 앞서 아이의 대입을 경험해 본 엄마들과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받아들인 학부모들의 표현대로라면 이미 나는 '너무 늦었다'.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학력고사 세대였던 우리에게는 고3부터라도 뭔가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때도 늦은 감은 있었지만, 흔히 말하는 '머리는 되는데 노력을 안 한' 종류의 유전자와 뇌 구조를 가진 학생이었다면 이후 일년간의 재수를 각오하더라도 대학이란 문은 두드려볼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수시와 정시구조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내몰린 현실은 어찌보면 그때보다 더욱 가혹했다. 최소 고1부터라도 자신이 가고자 하는 학교나 학과를 정해 관련된 공부나 활동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내신이나 모의고사만으로 평가되는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형도 여러가지라 자신에게 맞는 전형을 미리부터 정해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합격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아. 그래서 강남 엄마들이 중학교부터 아이들 관리를 시작한다는 거구나.'  무심한 엄마는 이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이런 입시구조에서 핵심을 제대로 짚긴 했다. 단순한 교과공부만으로 실력을 판단하진 않겠다,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과 활동성, 리더십, 의지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차원에서 이보다 더 잘 설계될수는 없다 싶었다. 게다가 자기소개서도 있었다. 자소서를 멋들어지게 쓰는 것도 어려운데, 아무리 미사여구로 현란하게 본인을 포장해 본다 한들 첨부되는 학생생활기록부가 있으니 그야말로 '빼박캔트'다. 서류전형으로만 끝나는 것도 아니다. 면접이 기다리고 있다. 본인이 지원한 해당 대학교의 해당 학과로 찾아가 몇 배수에 해당하는 아이들과의 오랜 기다림 끝에 교수와의 5분 면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질문들은 대략 본인이 해당학과를 지원한 동기와 관심사 등으로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열정을 가늠해 볼수 있는 시간이다. 이래저래 오래전부터 본인의 진로를 정하고 발전시켜 온 아이들을 위한 일련의 과정들임에는 틀림없었다.


지난 토요일, 수시로 지원한 학교 중 처음으로 발표된 학교의 면접이 있었다. 아이를 태워주기 위해 경기도 남부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길. 인서울로 골라서 지원했음에도 자연계라 캠퍼스가 경기도에 있었기에 어쩔수 없이 먼 길을 떠났다. 연휴의 시작인데다 에버랜드를 거쳐야 하는 코스라 교통체증을 감안하고 일찍 출발했음에도 여지없이 차는 정체됐다. 뒷좌석에서 두 아이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들었고, 초행길로 접어든 이 엄마는 낯설음에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날은 꾸무리했고 도착하니 우리처럼 일찍 출발한 많은 차들과 오전부터 시작된 면접대기차들로 이미 주차장은 꽉 차 있었다. 긴장하는 아이를 데리고 한시간 동안 캠퍼스를 거닐고 아이를 들여보내고 난 후에도 족히 세시간은 더 기다렸다.  


회색빛 하늘아래, 회색빛 건물들이 들어찬 캠퍼스는 사실 그닥 흥미롭지 않았다. 건물마다 표기해놓은 숫자를 보며 결국은 아이들의 등록금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생각과 이왕이면 좀 더 개성있게 지을순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가장 낡은 건물에는 학생들 동아리반이 들어차 있었고 식당은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까페는 외부 가격의 반값이라 반가워 커피와 생과일 주스를 주문했지만 역시나 맛은 딱 가격만큼만이었다. 면접실에 들어간 자녀들을 기다리는 학부모들과 다음 면접시간을 위해 캠퍼스를 배회하는 학생들 가운데 오전 면접을 끝내고 점심을 먹기위해 삼삼오오 나오는 교수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된채 재밌어 보였다. 여러명의 면접을 본다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겠으나 재미는 있는 일이란 걸 나는 예전 면접컨설팅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뭐랄까? 그들의 상기된 얼굴이 어떤 기분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고나 할까?


지나가던 다른 교수의 왜 이렇게 늦게 나왔느냐는 질문에 내 앞을 지나가던 교수는 말했다.

"그러게. 우리 과에 좀 더 좋은 학생을 뽑으려다 보니 자꾸만 길어졌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사실 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건방진 생각이라 할지라도, 내가 좀 꼬여 있다 해도 할 수 없다.

욕심은 날 수 있었겠다. 몇가지 질문을 하고 그에 대답하는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분명 그들과 코드가 맞고 똘똘해 보이며 맘에 드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학생과는 좀더 대화를 나누고 싶고 알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을 가리고 가려 뽑아서 입학시키고 난 후, 과연 교수들은 얼마나 그 학생들에게 정성을 기울일 것인가? 개별적 지도는 고사하더라도 최소한 작년 학습자료와 시험문제를 재탕하지는 않는가? 작년은커녕 10년전 자료를 그대로 쓰고 있지는 않은가? 자신의 교수직이 위협받을까 학과장에 충성하고 학장에게 유리한 줄을 대기 위해 그 노력을 쏟는 것은 아닌가? 학자라면 모름지기 연구에 게을러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연구보다는 자리보존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가르친 학생을 전공과는 상관없이 그저 대기업의 입사여부로만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한 고3 학부모는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는지 모른다. 설령 아이가 학교에 합격한다 해도 그닥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도 이런 학부모는 별로 반갑지 않겠지. 그럼에도 꾸역꾸역 아이를 태우고 이 먼 곳까지 와서 지루해하는 작은아이 손을 잡고 캠퍼스를 몇 번이나 돌며 큰아이의 면접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나는 뭘까? 다른 엄마들처럼 주관없이 남들이 다 하니까란 의견에는 휩쓸리지 않는다 자부했던 나는 어디로 갔나?

나름 변명을 하자면 우리는 큰아이와 대학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해 왔다. 물론 부정적인 측면에서. 큰 아이도 나름 수긍을 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주변 분위기에 초연해지기는 힘들었던 듯하다. 또 본인이 하고 싶은 뚜렷한 관심사를 아직 찾지 못했고. 그렇다면 일단 가 보고 본인이 판단하겠다는 논리였기에 우리 역시도 동조했을 뿐이다. 이제는 아이의 판단이고 아이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은 여기까지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참 못마땅했다. 사실 우리 아이의 합격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 시대가 요구하는 학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과는 본인이 정했지만, 뚜렷한 소신이나 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막연한 호기심, 그럴듯한 학과명, 추상적인 미래모습 정도랄까? 예전 우리네 동기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또한 면접에도 강한 성향이 아니었다. 발표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소위 튀는 것도 원치 않는 아이였다. 다만, 다른 이의 의견을 들을 줄 알고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화합을 주도하는 성격의 아이였다. 모든 아이들이 다 리더십이 강하고 발표력이 좋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대학면접 뿐만 아니라 이후 사회생활에서도 면접에 강했던, 발표 좋아하고 주관적 발언이 뚜렷했던 나로서는 사실 처음에 아이의 성향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여러명이 경쟁하는 구도에서 또렷한 눈망울, 조리있는 말솜씨, 똑 부러지는 말투는 분명 존재를 부각시킬수 있는 강점이다. 그런데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의 삶은 이후로 어떠했는가를 생각해봤다. 학교친구들, 사회에서 만난 이들까지 자기 삶에 만족하고 잘 사는 이들이 꼭 그 부류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 같이 내 의견 말하기 좋아하는 부류들은 남들 이야기 듣는 일에 절대적으로 취약했다. 말하기보다 듣는 일, 경청의 중요성을 나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가장 노력해야 할 점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내 딸아이가 가진 장점은 지금 그대로도 최고였다. 나는 내 딸아이에게 아이가 가진 장점을 버리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성향으로 바꾸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면접관들도 알게 될 것이었다. 꼭 주관을 가진 달변가만이 좋은 학생은 아니라는 것을. 이 사회에서 필요한 건 꼭 리더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사실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그저 아이에게 경험이 되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면접이 끝났을 때 실망할 아이가 좌절감으로 연결되지 않기만을 바랬다.

다행히도 입실한지 3시간만에 나온 아이는 지친 얼굴로 캠퍼스 구경이고 맛집이고간에 어서 집으로 가자며 재촉했다. 면접을 망쳤다고 우울해할까 미리 염려한건 나의 기우였다. 아이는 실망이나 좌절 따위 보다는 이런 면접형식의 무례함이 정말 싫다는 듯이 진저리를 쳤다. 5분도 걸리지 않는 그 면접시간을 위해 두시간여 동안의 기다림은 충분히 아이를 지치게 했다. 핸드폰도 금지됐고 어떤 음료수도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했다. 애초부터 기다림을 위한 그 어떤 배려도 없었다. 아마도 아이는 학교측의 그러한 이기적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듯 했다. 뒷좌석에서 잠든 아이를 태우고 교통체증으로 밀리는 도로를 운전해오며 나는 이 시대의 대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씁쓸하게 뒤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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