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랑_5
이번에는 가정법원이다.
살다보면 지인 중에 변호사와 의사를 찾는 일이 꼭 생긴다고 하는데 지금 이 순간 어른들 말씀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늘은 이혼서류를 제출하고 판사에게 이혼을 허락받는 날이다. 지난 밤 그녀는 잠을 설쳤다. 이런 날이 드디어 온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수만가지 생각 속에 이불을 뒤척였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그녀에게 그녀의 친정엄마는 애써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잘 하고 와."
회사에는 외근을 핑게로 점심먹기 전 일찌감치 나섰다. 버스를 기다리는 여의도 정류장에 봄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이렇게 눈부신 봄날에 그녀는 이혼 도장을 찍으러 가는 거다. 오늘이 지나면 그들은 더이상 부부가 아닌 거다. 이제 더는 되돌릴 수도 없게 되는 거다. 스물셋에 만나 이년간의 연애를 하고 오년을 살았던 그들은 오늘로서 남이 되는거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오늘 저녁, 그녀는 다시 싱글됨을 자축하는 술판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가정법원 정문 앞에 그녀의 남편이 서 있었다. 둘은 서로를 보고도 아무 표정없이 그렇게 법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혼접수를 위한 서류에 각자 서명하고 접수한 후, 대기번호표를 받았다. 접수 후에 판사앞에서 둘 다 동의 를 해야 최종이혼이 성립된다고 했다. 대기자가 많아 오전에 접수한 그들에게는 오후 시간표가 주어졌다. 시간이 많이 비게 생겼다. 차를 가지고 온 그녀의 남편은 정해진 시간에 지금 장소에서 만나자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시간을 때울 만한 곳을 생각하며 그녀는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책을 볼 시간 정도는 될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3호선 라인에서 생각나는 곳은 고속버스터미널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터미널로 향했고 익숙한 백화점의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평일 오전시간은 한가하여 티켓부스에도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약속시간까지 맞춰 볼 수 있는 영화는 하나밖에 없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
그녀는 표를 끊고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았다. 좌석이 그리 많지 않은 영화관이었음에도 드문드문 몇몇이 함께 온 주부들의 모습만 보였다. 영화가 상영되고 그녀는 영혼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영화에 대한 그 어떤 사전지식도, 감독에 대한 정보도 전무한 상태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쏟아지는 스크린의 영상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영화는 어떤 클라이막스도, 카타르시스도 없이 너무도 평범한 일상을 펼쳐놓고 있었다. 찌질한 인간의 군상들이 영화적 기교없이 무덤덤하게 펼쳐졌다. 웃기려고 작정한 건 아닐진대 피식 힘 빠진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영화는 그 어떤 현란한 카메라 기교도 없이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그녀는 화장실을 찾았다. 손을 씻는 그녀 뒤로 함께 영화를 보았던 주부들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뭐야, 영화가 너무 싱겁지 않니? 뭐 이런 영화도 다 있니?"
"그게 이 감독 특징이잖아. 그냥 우리네 사는 얘기지 뭐. 자연스럽잖아?"
등 뒤로 들리는 그네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녀의 머릿 속에서 또 다른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아니요. 현실은 이것보다 훨씬 영화같답니다. 배신과 술수가 난무하고 패악과 치졸함이 따라붙죠. 제가 아는 현실은요. 이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랍니다. 저는 한 시간 후면 이혼녀가 되거든요.'
영화 한편을 보고 와도 약속한 시간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커피전문점이 붐을 이루기 시작하는 때였음에도 교대역 법원앞 골목길에는 그 흔한 커피 전문점이 보이지 않았다. 낮은 조도의 어두운 실내는 다방을 연상케 했고 양복입은 나이든 남자들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며 큰소리로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혼자만의 고즈넉한 장소를 원했지만 그런 곳을 찾기에는 남은 시간이 허락치 않았기에 그녀는 그 남자들에 아랑곳 없이 자리를 잡고 커피를 주문했다. 촛점없는 눈빛의 젊은 여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 힐끗거리는 남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이 동네에선 너 같은 여자들이 무얼 위해 여기 왔는지 다 안다는 듯이.
이혼판결은 간단했다.
이혼을 기다리는 이들이 이층에 다시 모여 있었다.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 애타게 남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여자도 있었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앉아 있는 할아버지와 기대감에 부푼 할머니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당신들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보다 앞서 불려 들어갔던 그 노부부는 잠시 후 반대편 문으로 걸어나왔다. 오만상을 쓰고 앞서간 할아버지와는 달리 참으로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진작 안했는지 모르겠다며 할머니는 속이 다 시원하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이름이 불리고 그들은 판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판사가 호명하는 이름에 답하고 이혼의사에 이견이 없음을 알렸다. 아이의 양육권은 남편이 가지는데 동의하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판사는 둘의 정식이혼을 알렸고 문을 걸어나온 그들은 그렇게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전철역을 향해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걸어 내려가는 그녀의 마음에 휑한 찬바람이 불었다. 원했던 이혼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분명 어깨가 가벼워야 하는데 어깨춤까지는 아니더라도 아까 대기실에서 본 그 할머니처럼 속이 다 시원하다는 얼굴 정도는 지어줘야 하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그녀 홀로 내팽게쳐진 기분이 들었다. 서류상으로 이제 그녀는 당당한 싱글인데 그 가벼움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사람과 이제는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데 그녀는 옆구리가 허전했다. 분명 걷고 있는 건 그녀의 팔과 다리인데 마치 그 두 가지가 잘려나간 듯 느껴졌다.
'드디어 너는 이혼녀가 되었어. 축하해. 그리고, 이제 너는 혼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