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업, 앙헬레스 그곳은 악마의 도시_2
서울은 2016년의 크리스마스를 막 떠나보내려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저녁, 인천공항은 해외로 출국하려는 인파로 붐볐다. 리무진 버스 차고에서 끄잡아 내린 이민가방은 이미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며 그녀의 애를 태웠다. 꽉 찬 가방의 수하물 무게를 공항에 비치된 대형저울에 올려 가늠해보고 난 후에야 그녀는 안심하며 수하물대에 가방 두개를 끙 올려 놓았다. 항공사에서 요구하는 무게를 초과한 이민가방과 못지 않은 무게를 자랑하던 캐리어까지 보내고 난 후에도 여전히 노트북이 들어있는 가방과 아이의 책가방 그리고 사진기가 들어있는 가방과 두터운 파카가 그녀 손에 어지럽게 안겨 있었다. 공항내 캐리어를 찾아 너저분한 짐들을 실어놓고 한 손으로 캐리어를 끌며 또 한손으로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그렇게 그녀는 먹을거리를 찾아다녔다. 평소 밥 아니면 면이라는 일관성을 갖던 딸아이의 식성은 그날따라 왠일로 버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면세점 근처에 있는 롯데리아에 들어가 빨간 애나맬 의자에 옷이며 가방을 던지듯 구겨넣고 그녀는 아이를 위해 불고기 버거 셋트를 주문했다. 몇시간 후면 도착할 필리핀에서 아마도 줄곧 먹게 될 음식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음식 앞에서의 아이의 요구는 언제나 묵과할 수 없는 명제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엄마라는 이름이 가진 모성의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아이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녀는 입맛이 없어 앞에 놓인 감자튀김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지난번 처음필리핀을 찾았을 때를 생각했다. 필리핀 앙헬레스로 향하는 저가항공사는 하루에 한번 이 시간대가 유일하다. 필리핀을 처음 찾았던 지난 11월에도 그녀는남편과 함께 이시간에 비행기를 탔다. 밤 9시가 넘어 출발한 비행기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앙헬레스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추운 겨울바람을 맞고 올랐던 비행기에서 내리니 후끈한 한여름밤의 날씨가 그들을 맞았다. 계절을 넘나드는 시차였다. 게다가 한참 깊은 잠에 빠져있을 시간에 잠 못자고 활동하는 몸에서는 열량을 보충해달라는 소리가 아우성쳤다. 환락가와 더불어 24시간 불을 밝히는 식당들이 즐비한 앙헬레스 코리아타운이라 해도 술과 여자가 나오는 바가 아니고서야 술취한 남자들의 왁자한 소음과 거침없는 담배냄새가 가득한 식당 또한 들어갈 마땅한 곳이 없는 시간대였다. 가능하다면 출발전에 무언가 든든히 먹어두는 것이 좋았다.
그녀는 쌀국수를 택했고 방금 버거 하나를 뚝딱 헤치웠던 딸아이까지 합세하여 어느새 둘은 쌀국수도 모자라 김치찌개까지 시켜 깔끔히 비워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밤 비행기에 올랐고 아이는 평소에 잠들던 시간대에 맞춰 깊은 잠이 들었다. 크리스마스가 점점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이와 그녀의 필리핀 도착은 그녀의 남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터였다.
남편이 필리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4월부터였다.
그녀와 남편은 국내 한 대형 마트내 분식코너에 입점한 지난 겨울내내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김밥과 어묵, 고로케를 아이템으로 매장내 부스를 운영하며 두달동안 미친듯이 일만 하며 지냈다. 추석 당일과 구정 당일, 일년에 단 이틀만을 휴일로 정하고 거의 365일 운영을 모토로 하는 마트의 특성상 일요일도 없이 두달을 꼬박 일하면서 부부는 신체적 한계에 봉착했다. 주중은 별 재미 없다가도 주말이면 밀려드는 인파에 장사는 쏠쏠하게 재미를 보았지만 사람을 두고 한다 해도 손이 많이 가는 요식업이었기에 둘은 번갈아가며 매장을 지켜야 했다. 정확히 한달 후, 그들은 매장을 넘기는 것에 합의를 보았고 또 그로부터 한달 후 적임자가 나타나 섭섭치 않은 권리금을 받고 매장을 넘길 수 있었다. 지난 두달이 마치 1년은 지난것 같이 느껴졌던 그 해 겨울, 그들은 그 어느때보다 풍족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온 가족이 처음으로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그녀의 남편은 남자들의 로망이라 할 수 있는 대형신차를 난생 처음으로 과감하게 뽑았다. 어느새 큰 딸아이가 고3이 되었고 열한살 차이나는 작은 딸아이도 초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그녀는 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절박감에서 점점 멀어져 집안일에 매이고 있었다. 이왕이면 아이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몇달만이라도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에게 전념하자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한두달을 쉰다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는 경제사정이었지만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한다 위로하며 그렇게 그들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마땅한 기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편은 그전부터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필리핀 여행을 떠났다. 마침 같은 업종에 있던 지인이 필리핀내에 있는 대형몰에 매장을 하나 낼 준비를 하고 있다했다. 골프를 좋아하던 남편은 싼 값에 골프도 칠겸, 필리핀내 분식입점에 대한 가능성도 타진할겸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3박 4일의 일정동안 필리핀에서 그가 본 것은 어마어마한 인구였다. 수도인 마닐라도 아닌, 지방도시인 앙헬레스 클락이란 곳임에도 인구가 엄청났다 했다. 특히 필리핀의 신세계나 롯데라 할 수 있는 SM이라는 대형몰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며 못 살고 지저분한 필리핀이 아닌 그 곳만은 별천지로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미국내 쇼핑몰과 비슷한 모던하고 세련된 곳이라 했다. 온갖 다국적 브랜드들이 빠짐없이 입점해 있으며 크기는 미국에서 봤던 몰보다 몇배는 더 큰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그 몰을 오가는 필리피노들의 수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했다. 게다가 그들이 그 몰 안에서 쓰고 먹고 마시는 돈이 눈앞에서 보였다 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필리핀 음식이 너무 맛이 없더라 했다. 딱히 내세울만한 음식문화가 없을뿐더러 더운 나라답게 대부분이 기름에 튀기고 간이 짜고 쌀은 부서지는 롱라이스에 데코라는 것 자체가 없이 그냥 대충 퍼담아 밥을 엎어서 주는 모양새라 했다. 그 곳에서 남편의 지인은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몰에 입점할 자리를 소개받고 우리나라의 김밥을 런칭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그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의 경제 사정은 나날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체감할 수 있는 경제지수는 언론에서 떠드는 것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그대로 담습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불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고 최소 10년은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한국의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탓하며 결혼도 포기하고 있었다. 결혼이 없으면 출산도 없고 인구의 증가도 없을 것이었다.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한국의 인구는 급속하게 노령화되고 있었다. 모든 산업이 그렇겠지만 먹거리에서는 특히 소비할 주체의 수가 중요했다.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어찌보면 두번째 문제인지도 몰랐다. 소비할 인구는 한정되어 있는데 공급은 점점 늘어나면 결국 소비주체의 입맛은 점점더 까다로와질수밖에 없었다. 대중화를 위해 가격을 낮추고 메뉴를 통일한다 해도 소비주체에서 다양화를 추구한다면 결국은 요식업계는 제살깍기식의 덤핑구조 또는 대형자본을 등에 엎고 파고드는 대기업에서 그 자리를 내어줄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영세 자영업자들에게는 버틸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물주보다 높다는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올릴줄만 알지 내릴줄은 몰랐다. 비싼 인테리어를 하고도 일년도 안돼 버틸 힘이 없어 나가떨어지는 가게들이 부지기수였다. 월급쟁이를 그만두고 자영업에 뛰어든 지난 5년간 그녀가 경험하고 분석한 요식업계의 내용은 그랬다.
그럼에도 '먹는것'에 대한 사업은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한식'은 특별했다. 어느 나라든 자국음식에 대한 자부심이야 남다른 것이겠지만 그녀는 나름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체험한 음식문화에서 한식만큼 다양한 조리법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흔히 말하는 발효식품인 '장과 김치' 문화만 해도 특별한데 보통 밥상에 오르는 나물과 조림등에서도 데치고 삶고 찌고 무치는 일련의 조리법들이 땅콩만큼 작은 나라에서 전해지는 것치고는 무척 다양하고 창의적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특별했다. 세계 어디를 가봐도 한국인만큼 부지런한 민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세계를 다 둘러본 건 아니지만 말이다. 선진국이라는 미국, 영국에서도 한국의 공무원만큼 빠르게 일을 처리하는 곳이 없었고, 인터넷과 스마트폰등 IT가 강한 곳이 없었다. 선진국이라는 그 나라들에서도 그러했으니 다른 동남아와 중동, 남미등은 말해 무엇하랴. 한국인이 가진 근면성, 빠른 손, 유전자에 각인된 맛에 대한 감별능력에 대해 그녀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충분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을 이왕이면 이 좁은 나라에서 경쟁하는데 쓰기보다는 넓은 곳에 가서 펼치기를 바랬다. 그녀 세대가 늦었다면 그녀 자식세대에서는 그러한 시도와 생각들이 좀더 보편화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것이야말로 이 좁은 나라 한국땅에서 태어난 한국인으로서의 숙명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그녀가 도전해 보리라 생각했다. 사십사라는 나이는 아직은 늦지 않은 나이라 믿었다. 의지와 열정과 아직은 견딜수 있는 체력이 있다면 분명 죽기 전 도전해볼만한 가치있는 일이라 여겼다. 무엇보다 그녀는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외국인들에게 좀더 다양하고 감칠맛 있는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 '때'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게다가 큰아이는 드디어 고3이었다. 시험때까지만 버티면 그 이후에는 독립할 수 있는 나이다. 더불어 부모인 그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에 있어 걸림돌 하나가 제거되는 것이다. 이제 초등학교 들어간 작은 아이는 앞으로 6년, 초등학교 졸업때까지는 오히려 더 많은 경험과 다양한 시도들이 도움이 될 나이였다. 이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게 말했다.
"그 사업, 우리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