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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Dec 12. 2018

절망

필리핀 사업, 앙헬레스 그곳은 악마의 도시_5

남편이 렌트한 차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운전자 만큼이나 힘겹게 오는 빨간 소형차였다.

내부가 좁다며 그나마 그 차도 어제서야 급히 렌트를 할수 있었다는 남편을 보며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아 애매한 웃음만 멋적게 지었다.


창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속에서도 밤 특유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공항에서 얼마 가지 않아 한인타운에 접어들었고 도시의 가로등 사이로 술집들의 불빛을 지나 24시간 영업하는 한국마트에 차를 세웠다. 집에 아무것도 없다 했다. 당장 마실 물이라도 사야했다. 지난번 그녀가 왔을때 계약서를 작성했던 그들이 임대한 타운하우스 주변에는 변변한 마트 하나 없었다. 한국에서 흔한 편의점은 더더구나.


마트의 창백한 불빛 아래서 그녀는 남편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 보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지는 나약함, 불안한 눈빛...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녀는 애써 말을 아꼈다. 그저 물과 쌀, 된장과 감자, 소금과 설탕등 급한 식재료만을 장바구니에 담는 일에만 열중했다.

한밤 중 도착한 타운 하우스 입구에는 총을 든 가드가 서 있었다. 아직 입주민 차량으로 등록이 안되어 있었던듯, 주소를 묻는 가드에게 남편은 어색하게 설명을 했고 그닥 투철한 직업의식 따윈 없는 듯한 흐리멍텅한 눈빛의 가드는 선뜻 문을 열어주었다. 이미 몇달 전에 그녀가 와서 계약했던 집이었다. 한국에서도 몇번이나 머릿속으로 집구조를 그려가며 가구배치를 고민했던 집이었다. 먼저 살던 이들의 짐이 빠진 이층 저택은 휑했다.  예정대로라면 먼저 살던 이들이 마닐라로 떠난 후인 이주전부터 남편이 들어와 살고 있어야했다. 이미 그러마고 얘기가 된 터였다. 하지만 그곳에 남편의 흔적은 없었다.


새 집이 신기해 둘러보던 아이도 피곤함에 급하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그들의 짐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마닐라로 떠난 집주인은 작은방에 더블침대 하나를 두고 갔다. 이층에 있는 그 침대에 셋이 누웠다. 미치도록 고요한 밤이었다. 아이는 금새 쌔근쌔근 잠이 들었지만 그와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두런두런 어둠속에서 나눈 이야기는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남편은 고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지난 이주 동안, 아니 정확히는 한국에서 들어와 함께 살던 동업자의 집을 나온 후부터 그녀가 모르는 낯선 이의 집에서 함께 지냈었다 했다. 그녀가 모르는 그 낯선인은 한국인으로 SM 몰에 준비중인 그들의 샵을 인수할 의사가 있다며 연락해 온 사람이었다. 어찌 만나 계약을 성사시켜보려 했지만 역시나 여러 난관에 부딪혔고 그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했다. 나이어린 현지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에 뜨악했지만, 부모없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함께 지낸다는 말에 그녀는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가보다 그저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남편의 상태는 생각보다 몹시 심각했었던가 보았다.  도저히 그 큰 집에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았다 했다.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현지인들의 집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워낙 빈부격차가 큰 필리핀에서 정말 잘 사는 사람들을 빼고 나머지 소시민들은 한국의 70년대 생활상을 방불케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겉만 멀쩡하지 안을 보면 집들도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곳이 대부분이었고, 먹는 것도 사실 현지식으로 먹는다는게 한국에서 살던 이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입도 짧고 후각에도 예민한 남편의 입맛을 잘 아는 그녀로서는 그녀 없이 혼자 지낸 지난 시간들에 그가 겪어왔을 생활이 어땠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그의 마른 몸이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먹지도, 잘 자지도 못했을 터였다. 많은 얘기들을 하기에는 그 밤은 너무 짧았다.


이제 앞으로 그들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을 터였다. 그녀는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그만 자도록 해. 이제 내가 왔잖아. 다 잘 될꺼야. 내가 왔으니까. "

"그래. 당신이 왔으니 다 잘될꺼야. 정말 고마워. "

남편은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다시금 그녀는 가슴이 저릿했다. 먼동이 터오는 창문너머로 닭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필리핀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아침해는 일찍부터 사정없이 창문으로 들이쳤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고. 모든걸 서둘러야 한다고.

예전 영국 유학시절이 생각났다. 처음 도착하여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일주일동안 잠시 머물던 한인 숙박집의 룸메이트는 말했다.

"일주일이면 돼. 여기 적응하는 시간. 일주일 지나도 적응 안된다고 하는 사람은 일찍 짐 싸갖고 한국으로 돌아가는게 나아. 딱 일주일이면 적응 다 끝내는 거야. 외국생활이라는게 그래. "

'그래. 일주일이다. 여기 적응하고 정리하는 시간.'


그 결말이 어찌됐든 그녀는 끝을 보기 위해서 왔다.

처음 남편이 필리핀에 와서 SM몰을 보고, 그곳에서의 사업제의를 받은 후로 정확히 8개월이 지난 지금,

더 정확히는 그들의 예측과는 달리 사업의 진전이 없이 난관에 부딪쳐 헤맸던 지난 11월 초로 한달이 지난 지금,

그때 그녀가 처음으로 필리핀에 와서 멈춰진 이 사업을 맡아 스스로 해보겠다고 결심한 후로,

시간은 지났고 그녀는 이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달 전, 그녀가 이곳에 왔을때

동업자를 만나 경위를 따져묻고, 연관된 현지인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한국의 집을 팔아 필리핀으로 이주할 결심을 하기까지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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