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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Dec 20. 2015

발효의 시간들 #1_4

작은 식당주인의 좌충우돌 창업일기 #5

버텨내기와 이별


제주에서의 첫 창업은 사실 지금와 자평해보면 '성공적이었다'고 하고 싶습니다.

우선 처음 시작치고는 매출면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였고,

무엇보다 어디가서 경험해보지 못했을 값진 경험을 알차게 했다고 생각하며,

1년이란 시간을 10년처럼 치열하게 그렇게 열심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의 '그 어느날의 대박사건' 이후로 한번 괘도에 오른 매출은 서서히 안정기로 접어들어 지속적인 매출로 이어졌고

'평균의 법칙'처럼 점심시간이 바쁘면 저녁시간이 조금 한가하거나

점심시간이 한가하면 저녁시간이 바쁘거나 하며 나쁘지 않은 결과를 꾸준히 보여줬습니다.

다행히도 인복이 있었던지 함께 일했던 분들이 모두 좋은 분들이셨기에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해낼수 있었죠.


장사란 것이 참 그런것 같습니다.

매출이 안 나오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사장은 혼자 고군분투하게 되고

사람의 한계가 있는지라 체력적으로 힘이 들면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곱게 나갈수가 없게 되고

그러다보면 가게문을 여닫는 시간도 들쭉날쭉해지며 운영에 대해 점점 재미도 잃게 되는 악순환이 됩니다.

하지만 매출이 어느 정도 나오면 사람을 쓰게 되고

함께 하는 노동은 힘겨움을 이겨낼 즐거움을 주게 되고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여유로워지며

꼭 내가 아니더라도 굴러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니 자연적으로 유지가 되는 것일 테지요.


점심시간을 함께 해줬던 H와 J는 그 누구보다 손발이 잘 맞고 아이를 둔 엄마로써

공통의 관심과 더불어 배려심이 남달렀던 친구들이라 그야말로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더랬습니다.

가게를 넘기기 전까지 저와 함께 끝까지 함께 해줬던 친구들,

지금도 가끔 제주도에 가면 가장 먼저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이 되었지요.


그리고 저녁 서빙을 해줬던 어리지만 싹싹하고 일을 너무도 잘했던 예쁜 S.

스물두살이란 앳된 나이에도 그 예쁜 얼굴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마감청소까지 척척 해냈던 그녀 역시 그 누구와도 바꿀수 없었던 소중한 사람이었네요.

낮에는 치위생사로 일하고 저녁시간에 일하느라 퇴근시간마다 종종걸음을 치며 뛰어오던 그녀.

어여쁜 그녀를 보러 자주 오던 청년도 있었는데 결국 그녀는 다른 제주남자와 불타는 연애를 시작했더랬지요.

모두들 잊지못할 제주의 여인들이네요.


하지만 장사가 잘될수록 사장인 제 몸은 점점 지쳐갔습니다.

이제는 '버텨내기'가 시작된 건데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학교 3학년짜리 큰딸과 다섯살 유치원생인 둘째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엄마라는 이름은

고된 식당일을 끝내고 퇴근해도 여전한 집안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휴식은 커녕 종일 종종거리는 서글픈 여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가게에서는 들이닥치는 주문들을 쳐내느라 신경이 온통 그리로 쏠려 있으니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두 손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머리로는 다음 스텝을 계산하고 있고 두 다리는 굳건히 지탱해주었지만,

그 모든게 끝나는 마감때가 되면 집에 오는 길, 머리 위로 뜬 커다란 달을 보며 파김치가 된 몸과 함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습니다.


사는게 이렇게 힘든건가 싶고

어른의 책임을 다한다는게 이렇게 무거운건가 싶고

누구하나 위로해줄 이 없는 낯선 곳에서의 외로움이 사무치게 아파왔습니다.

그도 아니면 동네에 친하게 지내는 동생을 불러 술한잔 하는게 그나마 낙이어서

근처 빨간집에서 매운 닭발에 맥주 한잔하며 회포를 풀라치면 

어느 순간부터는 육체와 정신적 한계가 알코올의 힘을 빌려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고

집으로 오는 길 공터에 있는 잡초들을 발로 차거나 하늘의 달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거친 욕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황폐화가 아마도 그런 것이었겠죠


설상가상으로 가장 힘을 줘야할 부부란 이름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고 점점 더 제주에 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와중에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큰 딸은 육지로의 진학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거의 1년간의 치열한 딸과의 논쟁 끝에 엄마는 아이의 손을 들어주기로 합니다. 제주에 올때도 아이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행했던 만큼 큰 아이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았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주장한 적이 별로 없던 아이가 그만큼 집요하다할만큼 고집을 부린적이 없기에 그 간절함을 외면할수 없었던 까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나긴 고민끝에 내린 결론 '결국 나는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제주 첫 식당은 사실 '빚'으로 만들어진 가게였고

매출이 올랐다고 해도 생활비와 년세와 대출금을 갚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없었죠.

이런 식이라면 어디가서 살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무일푼으로 다시 시작한다 해도 지금과 별반 다를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온몸이 홀가분해지고 그동안 짓눌러왔던 고민에서 해방되더군요.


결론이 나자 이제 남은 건 가게를 처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여름부터 저는 가게를 몇몇 부동산에 내놓은 상태였습니다.

큰 아이 진학을 육지에서 하기로 결정한 이상 여유있게 준비하자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첫 가게였던 만큼 그리고 첫 매매였던만큼 욕심을 버릴수가 없어 과도한 권리금을 욕심낸 탓으로 가게는 6개월이 넘도록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해를 넘길수는 없겠다는 판단하에 권리금도 조금 낮추고 그동안 비공개로 했던 매물을 과감하게 오픈했습니다. 회원으로 있던 제주정착까페에 사진과 함께 올렸고 교차로에도 오픈했습니다.

사실 영업을 지속하고 있는 와중에 매물로 오픈한다는 것이 많이 꺼려지기도 했고 워낙 좁은 곳이라 소문이 금새 날 것이라 염려되어 두렵기도 했지만 더이상 부동산 업자들의 소식만 기다릴수는 없겠다 싶으니 과감해지더군요.


제주 이후로도 두세번 더 가게를 매매하게 되었는데 사실 경험상 제가 느낀 점은 '부동산을 신뢰하지 마라'입니다. 부동산하시는 분들로서는 여러 매물중에 하나일 뿐이고 권리금이 많다 싶으면 성사확률이 아무래도 떨어지니 적극적으로 판매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사진등의 자료를 이용한 브리핑등에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가게를 팔아야겠다는 '절박함은 가게주인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래에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겨울이 시작되었고 육지로 올라가야 할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학교배정도 받아야하고 교복도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 해를 넘기면 너무 늦겠다 싶은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꼭 올라가야 한다면, 올라가기로 한 거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고 결정을 했죠. 가게가 처분 안될때는 남편에게 맡기기로 마음을 비웠습니다. 가게를 처분한다면 자금을 들고 올라갈수 있으니 조금 도움이 되겠으나 역시나 그또한 안된다면 더 작은 원룸으로 이주할 각오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니 또한번 버리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홀가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적같이 가게를 인수하겠다는 적임자가 나타났습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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