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상상력이 필요한 때
고등학교 3학년 야자 시간에 봤던 책의 한 페이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해가 질 무렵 하얀색의 리알토 다리와 그 밑으로 지나가는 곤돌라들의 모습이 찍힌 베니스의 풍경이었다. 서해안 근처에 12년을 살고 있던 나는, 그 생경한 곳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옆에 앉아있던 친구와 나중에 꼭 이 곳을 가보자고 결심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모스크바를 거쳐 마드리드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탔다.
'베니스는 상상했던 그대로일까'
나에게 여행은 머릿속에 상상하던 어떤 장면을 확인하러 가는 여정이었다. 처음이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여행서를 보고,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고, 블로거들의 사진과 글을 읽으면서 그 나라에 대한 그 도시에 대한 나만의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그리스의 로도스, 프랑스 파리, 포르투갈의 포르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그리고는 그것들을 확인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르곤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여행은 상상하는 그 순간부터가 시작인 거다.
이런 내게 작년은 견디기 힘든 한 해였다. 상상은 실현 가능할 때 힘이 있는 것인데, 아무리 따져봐도 근 몇 년은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상상은 힘을 잃었다. 어차피 못 가니까. 그럼에도 여행이 너무 그리울 때는 유튜브에서 여행 영상을 찾아보거나, 외국에 살고 있는 블로거의 일기를 본다거나, 괜히 가이드북을 읽곤 했다. 그러고 나면 '아, 그 여행지가 여전히 그곳에 있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번 기획회의 528호는 이를 주제로 풀어냈다. 마스크를 끼고 생활한 지 365일이 다 되어가는 우리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 물리적인 여행이 불가능한 지금. '책'으로 다른 세계를 상상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말이다.
[여행할 땐, 책]을 쓴 김남희 작가도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여행 작가로 일하는 저자는 여행이 끊긴 지난 1년 여간, 짚 앞 숲길을 산책하며 읽은 [야생의 위로] 저자와 소통했다. [야생의 위로]에서 읽은 영국의 식물을 한국의 숲에서 발견하고, 책에 나온 곤충들을 유튜브로 찾아보기도 하고, 가본 적 없는 그곳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코로나19로 물리적인 여행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며칠 후 그 붉은 잎 사이로 흰색 꽃이 피어나 자엽꽃자두라는 걸 알았던 날, 나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그녀와 곧장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28p- '책이 여행을 대신할 수 있을까' 中
5년 전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매년, 한국말이 들리지 않는 곳을 다녀오는 게 연례행사였다. 평상시에 온갖 생각을 안고 사는 덕에, 며 칠이라도 온전히 오감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상의 관계와 의무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와 관련한 아티클로 박산호 작가가 쓴 '스티븐스 집사는 여행을 좀더 자주 가야 했다'를 소개하고 싶다. 35년간 한 집안의 집사로 일한 '위대한' 집사 스티븐스는 그의 주인인 패더레이 어르신의 "집안일을 챙기느라 늘 이런 큰 집에만 갇혀 살아야 하는 장신 같은 사람들이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구경이나" 해보겠냐는 제안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쉬는 방법조차 몰랐던 그는 그 여행길에서 스티븐스는 집사로서의 스티븐스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스티븐스를 만난다.
그런 그의 회상을 통해 나는 "위대한" 집사의 자질과 조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스티븐스에게도 그만의 삶과 사연이 있었음을 알았다. -40p- '스티븐스 집사는 여행을 좀더 자주 가야 했다' 中
사실 모든 여행이 대단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의 의무에서 조금 벗어나(카톡 때문에 완전한 차단은 힘들더라) 자신에게만 집중해보는거다. 외국문학 편집자로 일하던 북하우스 북하우스 퍼블리셔스 하정은 팀장은, 원고가 짐처럼 느껴졌을 때 떠난 90일간의 서점 여행으로 다른 길을 만들어냈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돌아가는 길을 찾은 기분이었다. 여행지에서 길모퉁이를 헤매고 헤매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드디어 만난 것처럼. 비타민과 찻잎과 책을 잔뜩 싸 들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52p- '다른 나라에서' 中
종종 우리는 인생을 여행에 빗대곤 한다. 왔다가 가는 것. 이번 코로나19라는 재앙이 '기회'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진작에 여행 좀 많이 갈걸', '진작 좀 만날걸', '취미 좀 많이 가져둘걸'이라는 말들을 작년 한 해 많이도 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않은 건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종식되고, 다시 여행길이 열리는 순간을 잡기 위해 상상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여행은 이미 출발하였다!